서울중앙지법 전경. 사진=연합뉴스
서울중앙지법 전경. 사진=연합뉴스

손실 난 금융상품 투자자들이 금융회사를 상대로 제기하는 손배소 접근방식에 변화가 포착됐다. 통상 민사소송을 통해 민법‧상법 등 사법(私法) 영역에서 금융거래에 따른 금전적 피해 보상을 시도한 것과 달리, 최근엔 형법(刑法)을 근간으로 하는 형사소송을 동반하거나 형사소송 제기 후 민사소송을 시도하는 양상을 보인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홍콩항셍중국기업지수(홍콩H지수) 편입 주가연계증권(ELS) 손실사태의 투자자들 800여명이 모인 금융사기예방연대는 법무법인 YK와 이달 중 홍콩 ELS를 판매한 6개 은행(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SC제일은행)을 상대로 민‧형사 소송에 착수키로 결정했다. 

이와 관련 길성주 금융사기예방연대 위원장은 “형사소송 건을 먼저 진행하고, 형사소송 결과를 토대로 손해배상 민사소송을 진행할 계획”이라며 “형사소송 건이 마무리되면 민사소송 시에도 순기능 역할을 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당초 이들이 소송에 나선 배경은 금융당국과 은행권이 제시한 자율배상안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서다.

앞서 금융감독원은 지난 3월 “판매사와 투자자 간 분쟁이 조속히 해결되길 바란다”며 관련 분쟁조정기준안(자율배상안)을 제시하고 은행권에 자율배상을 촉구했다. 평균 보상비율은 30~65% 수준으로 예상됐다.

이에 금융사기예방연대는 은행들의 불완전판매를 확신하고, 80~100% 수준의 배상을 원했다. 소송을 준비하면서 서류 조작 등 은행권의 사문서위조 정황을 발견함에 따라 형사소송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던 것으로 풀이된다. <본지 관련기사 2024년 7월 5일자 : [단독]은행권, 신탁 불완전판매 의심 정황…계약 동의 서명 복붙?, 2024년 8월 13일자 : [단독]NH농협은행 ELS①담당 직원 불완전 판매 정황 …논란 '불씨', 2024년 8월 19일자 : [단독]NH농협은행 ELS② 파생상품 가입자 ‘적합성 보고서’ 고의 누락 의혹>

◆ 민·형사 소송 진행 중 은행권 자율배상 효력 ‘관건’

금융투자 투자자가 민사소송보다 형사소송을 찾는 배경은 은행권 자율배상 효력의 상실 기한을 늦출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확인됐다. 금융회사와 소송을 진행하면서도 기존 은행권이 제시한 자율배상 효력을 유지하면 더 높은 배상 가능성이 있는 선택지를 저울질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법조계에 따르면 민사소송은 판결 직전까지 배상안 효력을 살릴 수 있다. 민사소송은 판결이 나기 전까지 언제든지 소송을 취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결이 확정됨과 동시에 배상안의 효력은 상실된다. 

이와 관련 한 법조계 관계자는 “법원의 판결권이 은행의 경영권보다 우선돼 판결과 동시에 은행권의 배상안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만일, 법원으로부터 ‘(은행이) 배상하지 말라’는 최종 판결을 받은 경우 은행이 이를 무시하고 배상을 진행하면 이는 배임이 될 수 있다.

반면, 형사소송은 배상 수준을 높이려는 목적이 아닌 처벌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소송 도중과 판결 이후에도 은행권 자율배상 효력이 지속된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형사소송은 사기적 행위에 대한 처벌을 위해 죄목을 판결하는 성격의 소송”이라며 “배상을 따지기 전에 은행들의 불완전판매와 위법 행위에 대해 가려보는 동시에, 배상안의 논의를 뒤로 미뤄 배상안 효력을 유지할 수 있는 최선책”이라고 부연했다. 

또 형사재판을 통해 배상 명령이 확정되면 민사소송과 무관하게 금전적 구제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김광중 법무법인 클라스한결 변호사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사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형사재판을 이용해 민사 손해배상 판결까지 받게 하는 형사 배상명령 제도가 있다”며 “소액 다수의 집단적인 사기 피해를 입으면 원금 회복을 위해 민사소송을 벌이기 쉽지 않고,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집행이 쉽지 않다. 그래서 형사 배상명령 제도를 이용한다”고 말했다. 

◆ “법원, 금융당국 자율조정안 존중 가능성 높아”

반면, 법조계 일각에선 당국의 자율조정안을 따르는 게 집단소송보다 유리하다는 시각이 있다. 기본적으로 금융투자 상품 가입에 따른 피해는 금융회사의 불완전판매 요인도 있지만, 투자자의 자기책임 요인도 작용하기 때문이다.

최재윤 법무법인 로집사 변호사는 “투자자가 주장하는 만큼의 원금 복구가 가능해지려면 계약 무효·취소 사유가 있어야 한다”며 “불완전판매만으로는 이를 인정받기 어렵다. 자신도 모르게 가입이 되거나 하는 특수한 사정이 있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어 “법원에서도 금감원이 제시한 자율배상안을 존중할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덧붙였다. 

금융권에서도 홍콩 ELS와 관련 당국이 내놓은 자율배상안이 판매사와 투자자 요인을 적절히 반영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금융감독원이 3월 발표한 분쟁조정기준안에 따르면 배상비율은 판매사, 투자자, 기타 요인을 합산해 산출된다. 판매자 요인은 20~40% 수준의 기본배상비율과 이번 현장점검 결과 및 내부통제 부실책임 정도에 따라 3~10%가 공통 가중된다.

금감원은 판매사(은행‧증권)와 투자자 각각에 배상 가산‧차감 요인을 따져 판매사 일방의 책임(100%)과 투자자 일방의 책임(0%) 모두 가능성을 열어뒀다. 다만, 파생결합펀드(DLF) 사태를 계기로 시행된 금소법에 따른 판매 규제가 강화된 점을 고려해 실제 배상비율은 20~60% 내 범위에 분포했다. 

이와 관련 금감원 관계자는 “금소법 시행 이전과 이후 상황에 따라 법규나 의무 수준이 차이가 있다”며 “실제 판매 과정에서 기본적인 설명 의무나 녹취 등 형식적 법규들은 상당 부분 갖춰졌다고 봤고, DLF 사태때만큼 내부통제의 문제가 있다고 보기 어려워 상대적으로 좀 작은 기준으로 배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파이낸셜투데이 신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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