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 만에 소환된 ‘김옥숙 비자금’
노태우 비자금은 경호실장이 관리
환수·처벌과는 별도로 ‘300억’ 출처ㆍ행방 규명해야

88올림픽 개회식에 참석한 노태우 전 대통령과 부인 김옥숙 여사. 사진=연합뉴스
88올림픽 개회식에 참석한 노태우 전 대통령과 부인 김옥숙 여사. 사진=연합뉴스

29년 전인 1995년 10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전국이 떠들썩할 때 꾸준히 제기됐던 의혹이 있었다. 바로 노태우 비자금과는 별개로 ‘김옥숙 비자금’, ‘청와대 안방 비자금’이 따로 있다는 얘기였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김옥숙 여사의 비자금은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면서 김 여사의 비자금이 2천억 원에 달하고 김 여사가 친인척을 통해 별도로 관리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검찰수사나 재판에서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이후 노 전 대통령 일가가 추징금 2628억 원을 2013년 완납하면서 ‘안방 비자금’은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졌다.

그런데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간의 이혼소송 항소심에서 김 여사가 작성한 ‘선경 300억’ 메모가 공개되면서 ‘안방 비자금’ 의혹이 다시 소환된 것이다.

◆ ‘선경 300억’ 노태우 비자금이 아니라 김옥숙 비자금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된 김옥숙 여사의 메모는 1998년 4월 1일과 1999년 2월 12일에 작성됐다. 1998년 메모에는 노 전 대통령의 동생인 ‘노재우 251억+90억’, ‘선경 300억’ 등이 기재돼 있고 아래에는 이를 모두 합산해 ‘맡긴 돈 667억+90억’으로 적혀 있다.

또 1999년 메모는 ‘노 회장 150억’, ‘신 회장 100억’, ‘선경 300억’ 등이 적혀 있고 아래쪽에는 이를 합산해 686억 원으로 표시돼 있다. 이 메모들을 보면 700억 원 가까운 비자금을 친인척이나 지인에게 맡겨 놓고 김 여사가 관리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 비자금의 근원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노태우 비자금 가운데 드러나지 않은 것을 관리했을 수 있지만,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재벌 총수들로부터 받은 비자금은 당시 이현우 경호실장이 관리했다.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수사가 시작된 이후 수사망에서 발각되지 않은 비자금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는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이후이기 때문에 700억 원 가까운 돈이 불과 2∼3년 만에 김 여사의 관리로 넘어가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돈은 처음부터 김 여사가 관리해 온 ‘안방 비자금’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김 여사, 재벌 총수 부인과 청와대에서 잦은 접촉

이렇게 ‘안방 비자금’이 다시 소환되는 이유는 노태우 대통령 시절 김 여사의 행적과도 무관하지 않다. 청와대시절 김 여사는 외부에 본인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인상을 줬지만, 실제로는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재계 총수의 부인을 청와대로 불러 잦은 접촉을 가진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당시 증권가에는 모 재벌 사모님이 청와대에 호출돼 들어가면서 얼마짜리 수표를 준비했다는 ‘찌라시’가 돌기도 했다. 또 부탁할 것이 있으면 노태우 대통령이 아니라 김옥숙 여사에게 해야 한다는 소문이 정설처럼 나돌기도 했다.

김옥숙 여사는 메모에서 자신이 관리하는 비자금을 ‘맡긴 돈’이라고 표현했다. 본인 입장에서는 맡겨 둔 것이겠지만, 상대방은 ‘숨겨준 돈’일 것이다. 이 메모만 보면 실제로 맡겼는지, 맡겼다가 되찾아갔는지 알 수가 없다. 설령 상대방은 돌려줬더라도 입증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1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이혼 소송 항소심 공판에 출석했다. 왼쪽은 법정 출석하는 최 회장, 오른쪽은 재판을 마친 뒤 법정을 나서는 노 관장. 사진=연합뉴스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1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이혼 소송 항소심 공판에 출석했다. 왼쪽은 법정 출석하는 최 회장, 오른쪽은 재판을 마친 뒤 법정을 나서는 노 관장. 사진=연합뉴스

그런데 이렇게 ‘검은돈’, ‘부정한 돈’이 딸 노소영 관장의 이혼소송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이 돈이 SK그룹에 흘러 들어가 총수 일가의 재산 증식에 기여한 것으로 재판부는 판단했고 그래서 노 관장은 1조3808억 원이라는 재산분할 판결을 받아낸 것이다.

‘선경 300억’은 대법원에서도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노 전 대통령이 사망했기 때문에 불법 자금인지 입증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또 ‘노태우 비자금’이든 ‘안방 비자금’이든 비자금으로 드러나도 수뢰죄 공소시효가 끝났기 때문에 처벌이나 환수는 힘들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환수나 처벌과 무관하게 돈의 출처와 주고받은 방식, 이후 돈의 행방에 대해서는 밝혀져야 할 것이다. 수백억 원의 비자금을 굴리는 사람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사법 정의와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투데이 김기성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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