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음악가 김준형 ‘엽편소설’ 주제로 11월까지
故 박성용 명예회장…영재발굴 매진한 클래식 마니아
매주 목요일·토요일 각각 전문가 및 영재 공연

피아니스트 김준형. 사진=금호문화재단
피아니스트 김준형. 사진=금호문화재단

기업이 문화·예술에 자원을 지원함으로써 국가 경쟁력과 사회에 이바지하는 활동의 총칭인 메세나. 그 어원은 로마제국의 정치인이자 후원자였던 가이우스 클리니우스 마이케나스Gaius Cilnius Maecenas입니다. <마이케나스>는 기업과 문화·예술의 상호 보완적 협력관계인 상생과 후원을 직접 발로 뛰어 경험하고 취재하는 이야기입니다. -편집자 주-

과거 광화문 금호빌딩 시절 금호문화재단은 3층에 금호아트홀315석을 개관, 주 3회 이상의 기획 연주회를 개최했다. 하지만 한 좌석만은 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일부러 객석을 판매하지 않은 것이다. 번호는 G열 7번. 명패에 소개된 주인은 다음과 같았다. ‘이곳은 음악과 예술을 사랑했던 고 박성용 금호문화재단 이사장께서 늘 앉으시던 자리입니다.’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 및 문화·예술인 후원에 헌신한 박 명예회장은 이사장 시절 피아니스트의 손동작이 잘 보인다는 이유로 생전 이곳을 지정석 삼아 표도 꼭 본인 돈으로 구매했다고 전해 온다.

◆영재발굴로 꾀한 대한민국 클래식 굴기

오늘날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일군 창업주 고 박인천 회장의 맏아들인 박 명예회장은 의재 허백련·송정 임방울 선생과 교류하던 부친을 닮아 예술 애호가였고, 클래식광이었다. 서울대 졸업 후 미국 일리노이대와 예일대에서 수학한 그는 유학 중 늘 음악을 들을 정도로 클래식에 열성이었고, 1996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일주일에 몇 번씩 연주회장을 찾았다.

금호문화재단은 ‘문화가 살아야 일류국가가 된다’는 기치와 기업이익의 환원이라는 목적 아래 1977년 설립됐다. 선대회장에게 재단을 이어받은 그는 국내·외적으로 여러 활동을 벌이며 무엇보다 클래식의 발전에 지원과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2000년 새문안로에 사옥을 준공하면서 클래식 전용홀인 금호아트홀을 함께 지었고, 음악영재 발굴에도 힘써 왔다.

박성용 명예회장(오른쪽)이 지난 1996년 4월 서울 중구 회현동 금호그룹 본사에서 열린 창업 50주년 기념식에서 장제 박정구 신임회장(왼쪽)과 손을 맞잡아 높이 들며 새 출발을 자축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박성용 명예회장(오른쪽)이 지난 1996년 4월 서울 중구 회현동 금호그룹 본사에서 열린 창업 50주년 기념식에서 장제 박정구 신임회장(왼쪽)과 손을 맞잡아 높이 들며 새 출발을 자축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국 클래식계의 미래가 차세대 영재육성에 있다고 믿은 박 명예회장은 1998년 국내 최초로 만 14세 미만 영재에게 독주무대를 제공하는 금호영재콘서트를 출범한다. 그다음 해인 1999년부터는 만 15세에서 25세 사이의 음악가가 대상인 금호영아티스트콘서트가, 사후 2008년에는 젊은 실내악 단체를 발굴하고 길러 내는 금호영체임버콘서트가 소개됐다. 발굴한 인원만 1000여명. 지난 25년간 금호콘서트는 음악영재의 요람으로 자리 잡았다.

피아니스트―김선욱·김수연·김태형·박종해·선우예권·손열음·임윤찬·조성진, 바이올리니스트―고 권혁주·김동현·김봄소리·박혜윤·신지아·양인모·이유라·이지윤·이지혜·임지영·조진주·최예은, 첼리스트―고봉인·문태국·최하영, 플루티스트 조성현, 오보이스트 함경, 클라리네티스트 김한이상 각 부문 가나다순 등이 모두 금호콘서트로 발굴된 음악가들.

세계 콩쿠르를 휩쓴 한국 수상자 대부분이 금호영재콘서트서 데뷔했다는 사실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이 국내 클래식의 황금기를 열었다는 평에 이어진다. 지난 11일 열린 신년 음악회 ‘히어 앤드 나우Here & Now’를 시작으로 2024년 금호아트홀 상주음악가로 선정된 김준형 역시 2012년 금호영재콘서트로 데뷔한 피아니스트다. 1997년생 청년 음악가인 그는 2021년 서울국제음악콩쿠르서 우승을, 2022년 ARD국제음악콩쿠르서 피아노 부문 준우승을 차지했다. 국내를 넘어 세계로까지 발돋움 중인 그는 올해 ‘엽편소설’을 주제로 내세운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이사장이 지난 2011년 7월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제14회 차이콥스키국제음악콩쿠르에서 입상한 금호영재 출신 연주자들을 축하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피아노 부문 2위 손열음(왼쪽부터), 박삼구 이사장, 피아노 부문 3위 조성진, 바이올린 부문 3위 이지혜 등. 사진=금호아시아나그룹
박삼구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이사장이 지난 2011년 7월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제14회 차이콥스키국제음악콩쿠르에서 입상한 금호영재 출신 연주자들을 축하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피아노 부문 2위 손열음(왼쪽부터), 박삼구 이사장, 피아노 부문 3위 조성진, 바이올린 부문 3위 이지혜 등. 사진=금호아시아나그룹

◆상주음악가로 심화된 육성의 연속

엽편소설은 나뭇잎 소설로도 불린다. 잎사귀 위에 쓸 수 있을 만큼 짧은 소설을 이르는 말이다. 김준형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응축한 그 엽편소설의 글짓기가 내가 공연을 준비하고 연주하는 것과 서로 닮았더라”고 말했다. 이에 ▲바흐, 베토벤 그리고 브람스로 말미암은 음악에의 ‘도전’ ▲슈만과 브람스로 빚어낼 ‘서정과 낭만’ ▲드뷔시로 공유할 공간의 ‘초월’ ▲리스트의 연극적이고 동적인 전개가 담길 ‘끝없는 여정’ 등이 주제로 고지됐다. 각 공연은 ‘아름다운 5월에’ ‘풍경산책’ ‘종을 향하여’라는 부제와 함께 각각 5월·8월·11월 중 열린다.

애초 상주예술가Artist-in-Residence는 전 세계 유수 미술관에서 시작된 제도다. 공연장 중에는 2013년 피아니스트 김다솔을 상주음악가로 선정하면서 금호아트홀이 국내에 처음 들여왔다. 음악가에게 중요한 것은 본인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하는 것과 그를 지지할 든든한 지지기반인데, 젊은 연주자의 성장에 이 제도가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직접 공연 프로그램을 기획해 예술가로서의 존재감과 자기만의 철학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연구기회와 교류환경도 제공된다. 김준형의 경우 피아니스트 유키네 쿠로키와의 피아노 이중주, 플루티스트 김유빈·첼리스트 문태국과의 삼중주 등을 앞두고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가 지난 2018년 1월 서울 종로구 금호아트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2008년 금호영재콘서트로 데뷔한 양인모는 10년 만에 상주음악가로 돌아와 파가니니 카프리스 독주와 바이올린과 클라리넷, 피아노 삼중주 등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총 5번의 연주회를 가졌다. 사진=연합뉴스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가 지난 2018년 1월 서울 종로구 금호아트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2008년 금호영재콘서트로 데뷔한 양인모는 10년 만에 상주음악가로 돌아와 파가니니 카프리스 독주와 바이올린과 클라리넷, 피아노 삼중주 등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총 5번의 연주회를 가졌다. 사진=연합뉴스

상주음악가를 선정하는 기준은 영재콘서트 시리즈와 크게 다르지 않다. 둘 모두 이미 기교가 완성된 연주자보다 될성부른 나무를 찾는 것이 원칙이다. 금호문화재단 측은 상주음악가와 관련 장래가 촉망되고 잠재력을 갖춘 30세 이하의 연주자를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지난해까지 김다솔·박혜윤·조진주·선우예권·문태국·양인모·박종해·이지윤·김한·김동현·김수연이상 연도순이 금호 상주음악가로 선정돼 기획력과 대중성을 양득했고, 대다수는 금호영재콘서트가 이들의 첫 무대였다. 초대 상주음악가인 김다솔과 12번째인 김준형조차 같은 영뮤지션 범주에 있는 금호라이징스타 시리즈로 과거 금호문화재단과 연을 맺은 바 있다.

◆“부침 있어도 기업의 꾸준한 관심이 중요”

초대 모토에 이어 재단은 ‘영재는 기르고, 문화는 가꾸고’를 원칙으로 내세우는 중이다. 오디션은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에 열린다. 금호문화재단 관계자는 “영재와 영아티스트, 영체임버를 일찍이 발굴하고 지원하는 것이 재단의 목적”이라며 “그중에서도 발전 가능성이 높고 본인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하려는 연주자를 우선으로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금호문화재단은 매주 목요일 밤 열리는 ‘아름다운 목요일’을 금호아트홀 연세390석서 이어오는 중이다. 지난 1997년 금호미술관의 ‘금호갤러리 금요콘서트’로 시작된 이 기획공연은 금호라이징스타 외에도 한국의 젊은 음악가를 조명하는 금호아티스트부터 세계적 음악거장을 초청하는 금호 익스클루시브까지 꾸준히 수준 높은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금호아트홀 연세 공연장 내부. 사진=금호문화재단
금호아트홀 연세 공연장 내부. 사진=금호문화재단

영재 및 영아티스트는 매주 토요일 목격된다. 오전 11시·오후 3시·7시 30분 공연이 열린다. 금호영재에 이어 올해는 금호영아티스트로 선정된 바이올리니스트 위재원은 “2011년 금호영재콘서트가 내 생애 첫 독주회였다”며 “그때 느꼈던 복잡미묘하면서도 강렬했던 감정이 내가 바이올린을 하는 이유가 되었고 음악가로서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올해 금호 상주음악가인 김준형과 ‘아름다운 목요일’ 시리즈는 서로 생년이 같다. 한 사람은 97년에 태어났고, 재단의 기획공연도 같은 해 처음 시작됐다.

관계자는 재단의 미래에 관해 “올해도 전과 같다. 영재 지원사업과 클래식 음악계의 향유를 넓히는 일의 장기화”라고 했다. 박삼구 전 회장의 퇴진 후 현재 재단 이사장은 이원태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부회장이 맡고 있다. 이 대목에는 금호문화재단의 총아인 손열음의 말이 마땅하겠다. 과거 그는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음악은 스포츠와 달리 성과를 내고 끝내는 게 아니라 평생 하는 것”이라며 “부침이나 고저가 있더라도 꾸준히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금호의 목요일 밤이 미래에도 아름다워야 하는 충분한 이유다.

[마이케나스] 목록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에게 집이란?
―금호의 목요일 밤은 언제나 아름답다

파이낸셜투데이 김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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