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개봉작

영화 ‘파일럿’ 스틸컷.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파일럿’ 스틸컷.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리뷰》

자타공인 최고의 비행 실력을 갖춘 스타 파일럿 한정우조정석 분. ‘유 퀴즈 온 더 블럭’에도 출연하며 인생 상한가를 치지만, 여성을 “꽃다발”에 비유한 녹음본이 폭로돼 성비위 논란에 휘말리면서 차도, 집도, 가족도, 그가 가진 모두를 잃고 한순간 처지가 급전직하하고 만다. 항공사 블랙리스트에 오르며 궁지에 몰린 정우는 아닌 밤중 여동생 신분을 빌린 데 이어, 여장에까지 도전하며 부기장으로나마 재취업에 성공하지만 기쁨도 잠시. 하와이행 비행기를 몰던 중 하늘에서 절체절명 위기를 맞닥뜨리며, 그만 여장 남자라는 정체가 탄로 날 지경에 처하는데⋯.

김한결 / 한국 / 110분 58초 / 16일 언론배급시사회 /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러시아 전통 인형인 마트료시카는 이름이 낯설지만 그럼에도 그 묘사는 반대로 친숙한 인형이다. 큰 인형 안에 작은 인형이 있고 그 안에 더 작은 인형이 들어 있는 형태인 마트료시카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비가 이것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조정석 주연의 ‘파일럿’은 그런 마트료시카를 닮았다. ‘영원한 납득이’ 조정석이 극 중 ‘여장’을 감행한다는 설정부터가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고, 마트료시카인 이 영화의 첫 인형은 이렇게 코미디로부터 출발한다.

다만 코미디물로서 웃음 타율이 높은 편은 아니다. 웃긴 장면 몇몇은 예고편을 통해 이미 다 공개됐고, 이 밖의 것도 여장 상황에서 ▲무심코 남자 목소리가 나오거나 ▲그 굵은 목소리를 일부러 내거나 ▲남자로는 전에 접한 적 없는 상황을 겪거나 등으로 금세 범주화가 가능하다.

영화는 왜 주인공이 금기인 여장을 단행했는지를 납득시키고자 이에 설득력을 부여하려고 부단히 애쓴다. 한정우 가라사대, 아르바이트로는 월 200만원 양육비에 집 대출 이자를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여성 파일럿 비중을 “5년 내 5 대 5”로 올리겠다며 “여자 아니면 안 뽑는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도는 상황도 정우가 여성 파일럿 한정미로 분하는 데 적극 일조한다.

남자가 여자가 됐으니 그가 여자로 겪는 차별은 누구든 예상한바, 정우는 그를 성적 대상화하는 눈초리와 거절했지만 계속되는 추파, 기성세대의 외모 품평을 여자 한정미로서 몸소 겪는다. 코미디 인형을 열면 그 다음 차례는 남녀 갈등의 조명이다. 예쁜 여자한테 예쁘다고 칭찬하는 것이 왜 문제냐는 남자 선배와, 일과 외모는 서로 교집합이 없으니 더는 품평하지 말라는 여자 후배의 말다툼은 그 순간 영화의 장르를 르포 내지 사회 고발물로 깜짝 반전시킨다.

코미디와 성평등 문제를 다루며 이즈음 충분한 추동력을 갖춘 영화는, 마지막 인형으로 자아에 관한 내용을 펼친다. 하릴없이 여장에 도전한다는 코믹한 소재와 달리, 이 영화를 요약하는 한 줄은 실은 다음과 같다. ‘돈이 전부인 줄 알고 앞만 보고 살아가던 한 남자가 결국 모든 것을 잃고서야 지켜야 할 것과 지키고 싶은 것의 차이를 깨닫는 이야기’. 마트료시카가 비싼 값을 받으려면 인형과 인형 간의 그림이 상호 달라야 하는데, 이 점에서 ‘파일럿’은 각 인형의 개성이 아주 뚜렷한 인형이다. 그러나 제일 끝인 마지막 인형이 아쉽다. 단순 코미디 영화라고 알고 극장에 왔지만, 대신 주인공의 ‘나, 가장으로 열심히 살았잖아’를 듣는 그 반전이 아쉽다.

특히 코미디도, 여성 인권도, 다른 인형은 겉핥기식으로만 끝나는 것도 아쉽다. 코미디면 코미디, 고발이면 고발, 성인成人의 비애면 비애, 무엇이든 하나에만 집중했다면 더 좋았을 테다.

스웨덴 영화 ‘콕핏’을 리메이크했다지만 배우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1982년작 ‘투씨’와도 전개가 흡사하다. 두 영화 모두 취업이 여장의 목적이고, 직장 동료에게 연정을 품고, 코스모폴리탄지와 화보를 찍는 장면, 심지어 결말까지 유사하다. 즉 조정석은 한국형 마트료시카에 해당하는 이 영화에서 코미디와 드라마를 오가며 호프만 못지않은 발군의 연기력을 선보인다.

파이낸셜투데이 김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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