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궁 전 CJB청주방송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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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한증. 한동안 유행했던 말이다. 중국과 한국이 축구 경기를 할 때마다 한국이 이기자 중국인들이 한국 축구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

한국과 중국은 1978년 이후 2010년 1월까지 총 27회의 국가대표 남자 축구 경기를 벌였다. 이 가운데 한국은 16승 11무로, 패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이 기록은 대한축구협회 기준이고, 실제로는 1982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메르데카컵에서 1:0으로 진 적이 있다. 중국인들이 한국 축구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은 병적이라고 할 만큼 강하여 여기서 유래한 말이 공한증이란 증세 아닌 증세다. (두산백과)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자까지 같다. 恐韓症. 국민의힘 전당대회 과정에서 회자하는 용어로 변신했다. 한동훈 후보가 한(韓) 씨라서 그렇게 활용한 것 같다. 사실 상대방에게서는 그렇게 공포를 느끼고 있지는 않는 것 같은데 기싸움의 말재주로 등장한 것이다.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는 이달 23일. 후보로 뛰고 있는 나경원과 원희룡, 윤상현이 한동훈을 향해 ‘배신의 정치’를 한다며 공세를 이어 가고 있다. 한동훈에게 ‘배신의 정치’ 프레임을 씌워 국민의힘 당원들에게 박근혜 당시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려는 전략인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한동훈 측도 가만있지 않았다. “당원과 국민에 대한 협박 정치이자 공포 마케팅”이라며 “아무리 자신을 무서워하는 ‘공한증(恐韓症)’에 시달린다 해도 협박과 분열의 정치는 안 된다”고 역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공한증.

대통령 윤석열에게 등을 돌렸다는, 이른바 ‘배신’의 낙인에 대해 한동훈 측이 치켜든 방어의 논리다.

한때 동지적 유대를 과시하다 경쟁자로 변한 원희룡의 공세가 드세다. 원희룡은 한동훈의 공한증 발언에 즉각 맞대응했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공한증 맞다”며 “어둡고 험한 길을 가는데 길도 제대로 모르는 초보운전자(韓)가 운전대를 잡을까 무섭다”고 날을 세웠다.

그는 또 “인간관계를 하루아침에 배신하고, 당원들을 배신하고, 당정 관계를 충돌하면서 어떤 신뢰를 얘기할 수 있다는 건가”라고 했고, 윤상현 후보는 “절윤(絶尹)이 된 배신의 정치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도 했다.

나경원은 기자들과 만나 “특정인에 대한 배신이 국민을 위한 배신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우리가 이해될 수 있다”면서도 “그 특정인을 위한 배신이 국민을 위한 배신이 아니라 사익을 위한 배신이라면 그것은 다른 차원”이라고 했다.

모두 한동훈이 ‘해병대원 특검법 수정 발의’ 제안 등으로 대통령 윤석열을 ‘배신’했다는 취지다.

당권 도전자는 아니지만 대구시장 홍준표도 가세했다.

홍준표는 “총선참패 주범이 또다시 얼치기 좌파들 데리고 대통령과 다른 길을 가려고 한다”고 한동훈을 비난했다. 역시 ‘배신’ 프레임.

홍준표는 “이회창이 YS를 버리면서 우리는 10년 야당의 길을 걸었다. 민주당이 노무현을 버리면서 똑같이 10년 야당의 길을 걸었다”며 “여당은 좋으나 싫으나 대통령을 안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총선참패 주범들이 러닝메이트라고 우르르 나와 당원과 국민들을 현혹하면서 설치는 것도 가관이다”, “이번에 당 지도부 잘못 뽑으면 우리는 또 10년 야당의 길로 갈 것이 자명한데 더 이상 정치 미숙아한테 미혹돼 휘둘리지 말고 정신 차려야 한다”고도 했다.

절대로 한동훈이 당 대표가 돼서는 안 된다는 흉중(胸中)이 그대로 드러난다.

관측통들은 한동훈이 ‘반윤’(反尹) 기조를 통해 합리적 보수 이미지를 구축하는 전략으로 차기 권력을 노리고 있다는 분석들을 이미 내놓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한동훈에 씌워진 ‘배신’ 프레임이 온당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한동훈이 단순한 사적 친분관계 이외에 윤석열에 대해 무엇을 배신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윤(尹)과 한(韓) 모두 당 외부에서 갑자기 들어온 인물들로 ‘정치적 동지’와 같은 개념을 적용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국민만 바라본다는 한동훈도 “이번 당 대표 선거가 인신공격과 마타도어가 아니라 당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고민하는 장이 되길 바란다. 그것을 당원동지들과 국민들께서 바라신다고 생각한다”고 밝혀 이를 뒷받침했다. 그는 그러면서 “진짜 배신은 정권을 잃는 것”이라며 “정권을 잃지 않고 승리하기 위해선 변화와 민심에 따르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배신의 정치’라는 공세를 막기에 힘겨워 보이는 한동훈 캠프 대변인은 “한 후보가 법무부장관 당시 몸 사리지 않고 거대야당과 맞섰던 모습들을 모두 기억한다. 한 후보야말로 정부에 대한 부당한 공격을 가장 잘 막아낼 수 있다”며 “어떻게든 상대에게 씌우려는 악의적 ‘배신 프레임’은 분명 당원과 국민의 심판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윤 대통령의 탈당설과 탄핵설에 대해서도 “발생할 가능성이 전무한 대통령 탈당을 입에 올리는가 하면, 탄핵 시나리오를 언급하며 전당대회를 공포의 장으로 만들고 있다”며 “당원과 국민에 대한 협박 정치이자 공포 마케팅”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내에서는 언제부턴가 ‘애들’이니 ‘초보자’니 하는 말들이 애용되고 있다. 또 ‘정치 미숙아’니 ‘얼치기 좌파’, ‘참패 주범’이라는 말도 오고 간다. 한솥밥을 먹는 동지들 간의 말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전혀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저잣거리 언사 그대로다. 듣는 사람이 민망하다면 과장일까.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대표 선발전은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구상, 철학과 사명, 신념은 없고 오로지 대통령과의 관계만을 내세우는 기형적 득표전을 벌이고 있다.

친윤(親尹)을 내세우는가 하면 창윤(創尹)이 있고 반윤(反尹), 절윤(絶尹)으로 상대를 매도하는 ‘무슨 무슨 윤(尹)’ 퍼레이드가 횡행하고 있다. 거의 코미디 수준이다. 임기 3년 남은 대통령과의 관계가 집권 여당의 미래 청사진보다 중요한 것인지 모르겠다. 정말 “뭣이 중헌디”를 외쳐야 할 것 같다. 왜들 이러시는가.

무슨 좀비처럼 연판장 얘기도 다시 등장했다. 이 문제는 결국 없었던 일이 될 것으로 보이지만, 디올백 사건 대국민 사과 문제를 상의했던 영부인 김건희의 문자를 한동훈이 씹었다는, 이른바 ‘읽씹’논란이 나름 축제의 장이 돼야 할 전당대회를 함몰시키고 있다.

공한증이란 말은 2010년 2월 10일 동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서 중국이 한국에 3 대 0으로 승리하면서 사라졌다. 32년 만에 한국 축구의 중국 전 무패 행진이 깨지면서. 국민의힘에서 떠돌고 있는 공한증이란 말은 실체가 있는 말인지 그냥 떠도는 유언(流言)인지 아직 모른다. 이 말이 배신이라는 단어와 함께 언제 슬며시 사라질지, 아니면 구체적 모습을 드러낼지 궁금하다. 국민의힘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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