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궁 전 CJB청주방송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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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우리 스스로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선진국의 한 일원이 된 지 오래다. 흔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를 선진국 클럽이라고도 하는데 이 OECD의 회원국이라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나라 국민들이 얼마나 잘 사느냐를 판가름하는 지표인 1인당 국내총생산(GDP) 면에서 이미 선진국이 됐다. 재작년에 벌써 구매력 기준으로 4만5600달러를 넘어섰다. 영국, 프랑스보다 조금 낮고, 일본이나 이탈리아보다 조금 높다. 선진국이라는 세계 유수의 나라들과 같은 반열에 올라 있는 것이다.

단군 이래 우리 민족이 이런 성취를 기록한 적이 있었던가. 자랑스럽고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가 피어나듯 기적적인 성장을 해 왔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세계인의 부러움을 샀던 우리의 전진(前進)은 여기까지인가?

외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자연재해로 강토가 절단난 것도 아니다. 증오와 혐오라는 ‘어리석음’이 우리 스스로를 죽이고 몰락시키는 저주의 나라가 돼가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2일 부산에서 60대 남성이 휘두른 흉기에 찔리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언론들은 이번 사건이 정치인을 향한 단순한 공격이 아닌,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는 점에서 심각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고 진단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피의자 김 모씨(67)는 경찰 조사에서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 이 대표를 살해하려 했다”라고 진술했다. 전직 공무원이었다는 김씨는 수년간 보수정당 당원이었으며, 태극기 집회에 여러 번 참가했고, 이재명 대표의 일정을 알아내기 위해 작년에 민주당에 위장 입당했다는 내용 등이 언론 보도를 통해 전해졌다. 유튜브를 즐겨 봤다는 이웃의 전언도 나왔다.

극단의 정치가 이어지면서 말이 칼이 됐다. 독버섯처럼 자라난 증오 정치를 종식시킬 방안을 찾아야 한다. 범죄심리학 전문가들은 김씨에 대해 정치·종교·사회 등에 대한 신념이나 확신이 결정적인 동기가 돼 범행한 확신범의 특징이 나타난다고 봤다. 배상훈 프로파일러는 “김씨에게서 자신을 영웅처럼 여기는 확신범의 특징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경찰 조사에서도 김씨는 ‘역사적 사명감’을 실현하고자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한 정황이 곳곳에서 포착됐다.

6일에는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 회원 20여 명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진입을 시도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은 “김건희를 특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통령실 면담을 요청하다가 옛 국방부 서문과 울타리 등을 통해 대통령실로 진입을 시도했다. 이들은 연행 과정에서 거세게 저항했고 일부는 경찰버스에 타서도 구호를 외치며 창문에 달린 덮개를 뜯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소속 현직 서울시의원이 대진연 회원들을 비판하면서 ‘사살’(射殺)이라는 표현을 써 논란이 되고 있다. 혐오를 부추기는 극언이 아닐 수 없다. 정치인들의 이런 무책임한 발언이 바로 사회적 혐오를 부추기는 것이다. 언뜻 해방정국의 혼란이 되풀이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수석부의장은 “이재명 대표에 대한 테러는 증오 정치의 산물”이라며 “우리 사회에 혐오와 증오가 넘치게 된 건 윤석열 정부의 과도한 이념 정치와 편 가르기가 그 원인 중 하나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한동훈 위원장은 동료 시민을 얘기하지만, 운동권은 척결 대상, 야당은 굴복 대상, 야당 지도자는 제거 대상일 뿐이다. 이러한 인식이 달라지지 않는 한, 한동훈 위원장은 슈트발 잘 받는 날씬한 윤석열에 불과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치권에서는 다행히 이재명 대표 피습 사건을 계기로 정치인의 언어 사용에 대한 자성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상대 진영을 향한 극단적인 언어가 증오와 혐오의 정치를 부추긴다는 반성이다. 오는 4월 총선을 앞두고 막말과 혐오 발언 이력이 있는 인사에게 공천 불이익을 주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어떤 기업 회장은 한국의 정치가 4류라면서 포니만큼만 돼도 좋겠다는 소회를 표현한 적이 있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 1995년 중국 베이징에서 “우리나라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한탄했다. 우리나라 정치판, 말이 좋아 ‘정치’판이지 ‘개’판에 다름아니다.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원수 보듯이 한다. 과장이 있지만, 혹자는 남북한 사이보다 더 적대적이라고 한다. 또 더러는 미국의 흑백 갈등보다 질이 좋지 않다고도 한다. 총기 소지가 허용된 나라라면 날이면 날마다 불상사가 끊이지 않을 것이란 얘기들도 나온다.

범인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의인이라도 된 양 당당한 자세도 유지했다. 삐뚤어진 신념과 확신, 정신장애가 ‘의인’(義人)의 가면을 쓰고 나타났다. 누가 증오를 부추기고 혐오를 조장하는가? 누가 이런 사람을 양산하고 있는가. 제2 제3의 정치인 테러가 이어지지 말란 법이 없다. 어쩌다 이리됐는가.

주범은 바로 우리 정치인들, 우리 정치권이다. 한 줌도 되지 않는 극성지지자들의 눈치를 보고 아부하다가 이 지경이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극기 부대를 나무라지 말라.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건 바로 정치인들이다. 부처나 예수가 가졌던 무애(無涯)의 측은지심이 다른 것이겠는가. 성경은 예수가 자신의 목숨을 빼앗는 자들을 나무라지 않았다고 전한다. 예루살렘 북쪽 성벽 밖 골고다 형장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 전 예수가 남긴 일곱 가지 말(架上七言) 중의 하나. “아버지, 사실 저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

서로 존중하고 타협하는 정치는 불가능한 것인가. 대통령부터 자세를 바꿔야 한다. 야당과의 대화를 왜 거부하는가. 확증편향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검사 시절에도 피의자들을 대할 때 예단과 편견을 가졌단 말인가. 한동훈 비대위원장도 보다 큰마음을 가져야 한다. 왠 고향이 그리 많은가. 가는 곳마다 무슨무슨 고향하면서 국민들을 갈라치기 해서는 안 된다. 이 작은 나라에서 무슨 짓들인가. 과한 아부가 부끄럽지 않은가.

“상대를 죽여 없애야 하는 전쟁 같은 정치를 종식해야 한다”.

이재명 대표가 10일 퇴원했다. 피습 8일 만이다. 이 대표는 “서로 존중하고 인정하고 타협하는 제대로 된 정치로 복원되기를 바란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 대표는 “이번 사건이 증오의 정치, 대결의 정치를 끝내고 서로 존중하고 상생하는 제대로 된 정치로 복원하는 이정표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우리 정치가 어느 날인가부터 절망을 잉태하는 ‘죽임’의 정치가 되고 말았다. 이제 이번 사건을 계기로 모두가 되돌아보고 저 역시도 다시 한번 성찰하고, 그래서 희망을 만드는 ‘살림’의 정치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저부터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통제 불능에 가까운 유튜브나 구상유취(口尙乳臭)한 언론도 문제다. 여야협치를 응원하고 대화정치를 유도하기는커녕 진영 간 갈등을 부추기고 대결을 조장해 오지 않았던가. 부산대에서 서울대로 전원한 게 그리 떠들어야 할 이슈인가? 정치가 무엇인가. 보수도 진보도 각자 옳은 길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 싸우되 상대의 논리, 상대의 주장도 같이 들여다보고 수용할 수 있는 금도(襟度)를 가져야 하는 게 아닌가.

정치권의 자정 노력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지구촌의 조롱거리로 전락하느냐, 부러움의 대상이 되느냐는 우리 스스로에 달려있다. 먹고살 만한 나라가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망조가 들면 너무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해와 공감은 없고 증오와 편견만 있는 사회, 내 편만 있고 네 편은 모르는, 갈기갈기 찢어진 나라.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정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역사에 남을 몰락’이 꼭 남의 일만은 아니다. 정치가 나라를 망쳐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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