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궁 전 CJB청주방송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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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판 스퍼트를 해서 굉장히 많이 따라잡은 것 같다”, “1차 투표에서 사우디가 3분의 2 이상을 득표하기가 어렵다면 우리가 2등에서 막판 뒤집기가 가능한 단계까지 온 게 아닌가. 부산엑스포 유치 가능성이 50%는 된다고 본다”

그러나 이적(異蹟)은 없었고 결과는 참혹했다.​

사우디 리야드 119표, 대한민국 부산 29표, 이탈리아 로마 17표. 1차 투표에서 사우디가 과반수를 득표하여 2차 투표에 들어갈 필요도 없이 2030엑스포 개최권을 가져갔다. 안대로 눈을 가리고 링에 오른 복서가 따로 없었다. 상대를 몰라도 너무 모른 것이다. 지난달 29일 새벽에 벌어진 일이다.

부산이 리야드에 대패할 수 있다는 판세 분석은 이미 9월부터 나왔다고 한다. 실무자들은 “근소한 열세가 아니라 최소 수십 표 차 대패 수준”이라고 우려했다.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유치를 설득했지만 사우디로부터 지원받은 자금 때문에 어렵다는 답을 들었다는 얘기도 들렸다. 언론이 전하는 정부 당국자들의 얘기다.

투표 전까지 우리 국민은 물론 대통령도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실제로 여권과 언론에서는 엑스포 개최지 투표를 앞두고 장밋빛 전망을 쏟아내기에 바빴다. 밤잠을 미루며 결과를 기다렸던 국민들은 넋을 잃었다. “아니 이럴 수가!”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가 나왔다. “제 부덕으로, 죄송하다”고. 피차 듣기도, 말하기도 민망한 사과가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영업사원 1호’의 그간 호언(豪言)들이 공허해진 순간이었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불편한 속내를 먼저 드러냈다.

“미국에서 돌아온 대통령에게 유치전 판세가 박빙이라고 거짓 보고하고 하루 만에 또 파리로 출장 가게 한 참모들이 누군지 밝혀내 징치(懲治)해야 한다”. 윤 대통령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을 마치고 귀국한 지 이틀 만에 유치활동을 벌이기 위해 프랑스 파리 방문 일정에 나선 것을 두고 한 말이다.

홍 시장은 “엑스포 발표 이틀 전 유력 일간지 헤드타이틀로 ‘49 대 51 막판 역전 노린다’고 전 국민을 상대로 거짓 정보를 보도케 한 참모들이 누군지 밝혀내야 한다”며 “그런 무능하고 아부에 찌든 참모들이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정권을 망친다”고 일갈했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도 가세했다. “엑스포 실패는 단군 이래 최대의 국제적 망신이다. 국정조사를 해야 한다”며 “외교부 및 국정원의 사태 파악과 보고 여부, 보고를 어디에서 어떻게 처리했는지, 대통령에게 보고한 실제 내용, 대통령의 오판 사유가 밝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정부나 대통령실은 무슨 변명이라도 좀 해 봐라! 세월이 약이라는 말인가?프레시안이 “미국과 일본에만 집중하며 고립 자초한 윤석열 정부 외교 결과”라는 외교 전문매체 <디플로매트>의 분석 기사를 전했다. 2030년 부산의 엑스포 유치 실패는 한마디로 윤석열 정부의 외교와 전략, 정보가 모두 뒤죽박죽이었다는 것을 보여준 결과였다는 분석이다.

매체는 윤 대통령이 ‘글로벌 중추 외교’를 목표로 하고 있으나 “그의 외교적 관심은 약간의 유명인사와 만남 및 무기 거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미국과 일본에 집중되어 있다”며 정부의 외교 방향이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전문가들은 오래전부터 그의 외교가 포용적이지 않고 오히려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는 설명을 해 왔다”고 덧붙였다.

중국과의 관계도 엑스포 유치 실패의 주요 요인으로 꼽았다. 매체는 “윤 대통령과 중국 간 충돌은 중국이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아프리카 지역을 소외시켰다”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중국은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의 일부 국가들에게 부산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도록 강요했다”고 알렸다. 매체는 “이제 정부는 윤 대통령의 남은 임기에 대비해야 할 때”라고 충고했다. 얼굴이 뜨거워진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96개국의 정상급을 만났고 4억 달러가 넘는 예산을 집행했지만 엑스포 유치에 실패했다. 여러 매체와 관변 전언을 종합해 보면 우리의 유치활동은 거의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에 다름 아니었다.

“실무 부처의 비관적 판세가 대통령실에 들어가도 윤 대통령에게는 이런 상황이 보고되지 않은 것 같다”는 지적들이 관변에서 나왔다. 이게 무슨 말인가. 대통령실의 언로가 이리 막혀있다는 뜻인가.

“전하, 이건 아니옵니다”를 간언(諫言)하지 못하는 대통령실의 고압적 경직이 어떤 비극을 낳는지 목도하는 것인가. 부마사태를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대통령의 눈과 귀, 머리를 마비시켰던 차지철의 비뚤어진 아부와 충성이 결국엔 ‘10.26’이라는 비극을 초래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왕을 무서워해, 아니면 ‘아부에 찌들어’ 바른 소리를 못 하는 신하는 결코 충신이 될 수 없다.

조선시대 왕들은 지금의 대통령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입법 사법 행정 전권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 엄혹한 환경에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는 신하들이 많았다. 목숨을 담보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직언 때문에 개인은 물론 멸문지화를 당한 신하가 한둘이 아니었다. 지금은 이른바 민주공화국 시대. 일자리가 날아갈지는 몰라도 목숨까지는 쉽게 내놓지 않아도 될, 삼권이 분리된 ‘안전한’ 시대다. 참모들이 왜 ‘옳은’ 소리를 못 하는가 모름지기 신하 된 자들은 감언이설로 권력자의 총기를 흐릴 경우 지금은 편하고 좋으나 후일 큰 재앙이 돼 돌아온다는 진리를 명심해야 한다.

직언이 막히고 언로가 차단되는 이유는 많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최고 권력자의 성정이다. 권력자가 소통의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할 경우 참모들은 입을 닫고 그의 눈치만 살피게 된다. 곧은 소리, 바른 정책이 잠수하고 듣기 좋은 아첨과 동족방뇨(凍足放尿)의 하책이 난무한다.

미국은 외교관들의 ‘반대 전문’(電文·dissent cable) 제도를 베트남 전쟁이 수렁에 빠진 닉슨 행정부 때인 1971년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직업 외교관이 실명으로 대통령과 장관에게 반대하는 제도다. 이라크 전쟁 반대(2003년), 보스니아 내전 개입 촉구(1993년) 등이 제안됐다. 국무부는 외교관들이 반대의견을 내도 인사상 불이익이 없을 것을 약속하고 ‘건설적 반대상’을 만들어 독려하기까지 한다. 미 국무부의 이 독특한 제도는 최고위 당국자가 혹시 놓쳤을 반대 논리를 듣는 기회를 더 갖겠다는 뜻이다. 단 한 차례의 오판일지라도 초래할 위험이 큰 안보와 핵과학 영역에서 먼저 시행됐다. 타산지석이 될 미국의 예를 동아일보가 소개한 것이다. 집권자들이 새겨야 할 내용. “전하! 아니 되옵니다”를 허(許)해야 한다. 국익을 위해서 그렇다.

우리의 경우도 참모들이 충신 노릇할 기회는 많다. 국무회의라는 좋은 자리가 있고 그 외 대통령실 수석비서관 회의 등도 있다. 재주가 많고 식견이 뛰어났던 故 이어령 문화부 장관은 국무회의에서 이런저런 의견을 많이 낸 것으로 유명하다. ‘노견’(路肩)이란 한자어를 순수 우리말 ‘갓길’로 바꿔 사용하게 된 것도 그의 덕이다. 그가 건설교통부 장관 ‘나와바리’를 의식하고 이 눈치 저 눈치를 의식해 침묵으로 직을 유지했다면 이 좋은 단어를 우리는 갖지 못했을 것이다. 장관들이, 참모들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방통위의 파행, KBS 사태, 검찰과 야권의 갈등 등은 뭘 말하는가? 자부심과 명예를 자랑해야 할 인사들이 권력의 하수인, 부역자로 비판받는 이유는 뭔가. 그들이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아니 자신들의 정권 안보를 위해서라도 단 한 번이라도 “전하! 이건 아니 되옵니다”라는 ‘진언’을 했을까?

요즘은 쓴소리를 한다해서 목숨까지 잃을 일은 없다. 왜 “전하! 이건 아니옵니다”를 못한다는 말인가. “대통령님! 부산 엑스포, 안 됩니다. 포기합시다”라는 말이 그리 어려웠나. 사우디 119표 대 한국 29표. 꼭 뭘 크게 사기당한 것 같은 이 처참한 느낌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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