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궁 전 CJB청주방송 대표이사

이궁 전 CJB청주방송 대표이사
이궁 전 CJB청주방송 대표이사

‘레임덕’이란 말이 있다. 영어 표현이다. 일부 어려움이 있는 분들에게 결례가 될 것 같아 영어 단어를 그대로 쓴다. 레임(lame)과 오리(duck)가 결합하여서 탄생한 용어 ‘lame duck’. 18세기 영국의 증권시장에서 빚을 갚지 못해 채무를 이행하지 못한 증권거래인을 지칭했던 단어다. 경제용어였다. 19세기부터 정치권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임기 말의 권력이 약화한 공직자를 ‘뒤뚱거리는 오리’(lame-duck)에 비유했다. 또 힘이 빠진 정권이 보여주는 ‘권력누수현상’을 이르기도 한다.

오리는 종류가 수도 없이 많은 조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중에서도 특히 청둥오리를 좋아한다. 집오리의 원조격인 청둥오리는 전통혼례를 올릴 때 신랑신부의 ‘사랑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옛 시절엔 살아있는 청둥오리를 사용했지만 근자엔 목기러기를 사용한다. 청둥오리는 지금도 천연기념물로 국민들의 사랑과 보호를 받고 있다.

지난 대선 전후 윤석열은 국민의힘 진영은 물론 상당한 중도 진영으로부터도 많은 기대를 모았던 ‘청둥오리’였다. 국민들의 사랑을 받던 청둥오리가 ‘미운 오리’로 전락하는 것인가. 여의도에 회자하는 언사들 중에 ‘레임덕’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관계가 없는 일처럼 보였던, ‘먼 일’이 하나의 징후로 다가왔다.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판사는 지난달 이재명 대표에 대해 위증교사와 백현동 개발비리, 대북송금 사건과 관련해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피의자의 방어권 보장 필요성 정도와 증거인멸 염려의 정도 등을 종합하면, 피의자에 대해 불구속 수사의 원칙을 배제할 정도로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어느 쪽의 손을 들어도 시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어찌 보면 ‘외롭고 어려운’ 소신과 결단을 보여줬다. 그가 정치적인 계산을 하지는 않았을 터, 달이 차려면 아직 많이 남아 있지만 대 하해(河海)의 시원처럼 멀리서 ‘작은 일’이 샘물처럼 소리를 낸 것이다.

허무하게 귀중한 목숨을 잃은 채상병 관련 수사 사건도 하나의 신호라면 신호. 해병대 박정훈 전 수사단장은 지난 7월 집중호우 실종자를 수색하던 중 급류에 휩쓸려 순직한 채 상병 관련 수사결과를 경찰에 이첩하지 말고 보류하라는 이종섭 국방부 장관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 군검찰에 입건됐다. 군검찰은 박 전 단장을 군형법상 항명 및 상관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향후 재판 과정이 주목된다. 당국의 표현대로 군기‘문란’이란 말이 예사롭지 않다. 지휘계선의 지시를 어기고 하급자가 항명을 했다는 얘긴데 상징하는 바가 크다.

어느 정권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레임덕은 대통령취임식과 함께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윤석열 정권도 예외가 될 수는 없는 일인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연기는 이것으로 끝나 보이지 않는다. 국민의힘 지도부가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의 사퇴를 대통령실에 권고한 것은 레임덕의 시작을 알리는 구체적 신호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일찍이 가당키나 한 일이었던가. 국민의힘 최고위원회의는 ‘강서 참패’ 후 회의에서 김 후보자의 사퇴 권고 의사를 ‘감히’ 대통령실에 전달하기로 뜻을 모았다. 개별 의원이 아닌 지도부 차원에서 김 후보자에 대한 대응 방침을 정한 것은 처음이다. 대통령실은 결국 자진사퇴 형식을 빌려 후보자지명을 철회했다. 강서구청장 선거 패배로 여론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김 후보자 임명까지 강행할 경우 정치적 부담이 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여당 일각에서는 “내년 총선은 망한 것”이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 지도부 사퇴뿐 아니라 대통령실 인적 쇄신까지 필요하다는 요구도 나왔다.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은 한 라디오에 출연해 “보궐선거 패배는 대통령의 패배”라며 “윤 대통령은 여러 사건에서 절대 책임을 안 지고 자기 과오와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쏟아냈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도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서울시장 보궐선거와 대선,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쌓아 올린 자산이 오늘로써 완벽하게 리셋(reset)됐다”고 썼다. 영(zero)으로 돌아갔다는 것. 홍준표 대구시장도 가세했다. 강서구청장 선거 결과에 대해 ‘역대급 참패’라면서 “민심 이반이 이렇게까지 심각한 줄 미처 몰랐다”, “도대체 이렇게 민심이 멀어져 갈 때까지 우리는 그동안 뭘 했는지”라고 혀를 찼다.

한 매체는 국민의힘 의원들의 말이라면서 “강서구청장 선거 결과는 대통령에 대한 심판이다. 대통령이 안 바뀌면 선거고 뭐고다 꽝이다.”, “국민들이 국민의힘을 찍는 걸 쪽팔려하는 형국이 돼 버렸다”고 전했다. 투표할 때 붓두껍이나 손가락을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애먼 손가락을 자르고 싶다는 지지자들 얘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뭐가 잘못됐을까? 불통과 옹고집이다. ‘충신’이 없고 ‘간신’만 있는 것도 문제. 윤대통령이 노선을 바꿔야 하는 이유다.

레임덕의 결과는 민망하다. 아들들이 영어의 몸이 됐던 YS나 DJ의 사례가 그것을 말해준다. ‘권불십년’은 옛말이다. 이제 ‘권불삼년’(權不三年)? 탈당 요구는 물론 신당 창당 움직임까지도 가능하다는 시나리오가 나돈다. 윤 대통령은 이제 어떡할 것인가? 누구 말대로 ‘드라마틱’은 아닐지라도 ‘현명한’(longheaded) 엑시트를 생각해야 한다. 집권자가 뒤뚱거리고 나라가 엉망이 되는 상황은 그 자체로 비극이다.

정치를 지혜롭게 하라는 충고가 넘치고 있다. 야당과 협치를 왜 못하는가. 확증편향? 당치않은 사고다. 큰 정치인이 되려는 사람은 정적에게도 모름지기 금도(襟度)를 가져야 한다. 한 줌도 안 되는 무슨 부대가 그리 중요한가? 여권은 이제 연세대 교수 인요한의 일거수일투족에 운명을 거는 형국이 됐다. 회심의 카드로 발탁했다는 그가 혼란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당을 혁신해 내년 총선을 도모할 수 있을지 관심사다.

이성과 정의가 없는 정부는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 조롱의 대상이 되는 통치를 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직 인수위나 대선 캠프 인사들이 다 동지인가? 이런저런 연줄을 내세워 숟가락 하나 얹은 사람들, 함부로 써서는 권력에 망조가 들기 십상이다. 일국의 장관직은 존경받는 자리여야 한다. 일반의 비웃음 너머로 당사자마저 떳떳해하지 못하는 자리가 돼서는 안 된다. “군사정권 시절의 장관 정도는 돼야 한다”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이제부터는 오로지 대통령 자신과 나라를 지킬 생각을 해야 한다. ‘식객’들을 위한 시간은 지났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이집저집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면 시골 마을에선 저녁 끼니때가 됐음을 알게 된다. ‘레임덕’은 그렇게 찾아온다. 백 미터 달리기처럼 스타트 라인이 있는 게 아니다. ‘레임덕’을 우리말로 어떻게 달리 표현할 수 있을까? 머릿속을 맴도는 영화제목이 있다. 바로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헤어질 결심’. 사랑의 상징이었던 청둥오리가 벌써 ‘레임덕’이 되면 그건 국가적 불행이다. 너무 이르다.

<외부 필자의 기고와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침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파이낸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