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 등 ‘헬로우, 팝 아트’展 현대예술관서
1998년 6월 개관…공업도시를 문화도시로
한국메세나대상에 빛나는 메세나 강호

현대예술관. 사진=김영재
현대예술관. 사진=김영재

기업이 문화·예술에 자원을 지원함으로써 국가 경쟁력과 사회에 이바지하는 활동의 총칭인 메세나Mecenat. 그 어원은 로마제국의 정치인이자 후원자였던 가이우스 클리니우스 마이케나스Gaius Cilnius Maecenas입니다. <마이케나스>는 기업과 문화·예술의 상호 보완적 협력관계인 상생과 후원을 직접 발로 뛰어 경험하고 취재하는 이야기입니다. -편집자 주-

꽃은 삶과 죽음의 명징한 존재다. 꽃이 피고 시드는 건 생의 자연적 반영이며, 즉 이 지구상의 모든 건 태어나고 죽는다. 192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빈민가에서 태어나 후에 팝아트 거장이 되는 앤디 워홀에게 ‘플라워Flowers’ 시리즈는 경력의 분기점인 작품이다.

캠벨수프도 아니고, 마오쩌둥도 마릴린 먼로도 아니다. 대중문화와 소비주의에 집착하던 그가 문득 자연계에 시선을 돌린 것이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큐레이터 헨리 겔드자레르의 제안에 한 사진잡지서 히비스커스 사진을 발견한 워홀은 이것을 오리고, 자르고, 붙였다. 1964년 11월 카스텔리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서 총 28점 모두가 완판됐고, 비로소 상업 디자이너에서 작가로 거듭났다는 평을 얻었다. 미술사적으로 꽃은 소재로 흔했지만, 대량생산에 적합한 실크 스크린 기법을 사용했으며 정방형으로 제작돼 기존 회화와의 차별성도 구현했다.

대중은 작가의 전작인 ‘브릴로 박스Brillo Box’나 죽음과 재난보다, 밝고 희망적인 이 작품에 훨씬 수용적 자세를 취했다. 20년 후 워홀은 ‘데이지Daisy’ 시리즈를 통해 다시 꽃에 천착한다.

예술은 독창적이어야 한다는 관념에 끝없이 도전한 워홀. 그가 만든 ‘플라워’의, 한정판 판화가 울산광역시이하 울산에 왔다. 내달 3일까지 HD현대중공업과 현대예술관은 전 세계 현대미술의 아이콘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헬로우, 팝 아트Hello, Pop Art’전을 개최 중에 있다.

▲백남준의 친우였고 ‘모든 사람은 예술가’라는 말을 남긴 요셉 보이스 ▲길거리 풍자로 사회문제를 꼬집는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 ▲그라피티를 순수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은 존원 ▲천진난만한 화풍으로 인간의 불안과 상실을 그리는 아담 핸들러 등, 거장부터 MZ세대에 새로 주목받는 작가까지 이들의 작품 100여점이 현대예술관 미술관에서 관객을 기다린다.

앤디 워홀(가운데)과 조수 필립 페이건(왼쪽), 제라드 말랑가(오른쪽)가 첫 팩토리(The Factory)인 미국 뉴욕 맨하탄 이스트 47번가 231번지 5층에서 ‘플라워(Flowers)’를 주제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앤디워홀재단
앤디 워홀(가운데)과 조수 필립 페이건(왼쪽), 제라드 말랑가(오른쪽)가 첫 팩토리(The Factory)인 미국 뉴욕 맨하탄 이스트 47번가 231번지 5층에서 ‘플라워(Flowers)’를 주제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앤디워홀재단

◆울산 미술진흥에 힘쓴 현대예술관

전국경제인연합회현 한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기업의 문화·예술 사회공헌은 재단설립과 이에 따른 문화시설 건립에서 시작된다. 울산 동구 서부동에 위치한 현대예술관은 지난 1998년 6월 개관한 문화·체육시설이다. 올해로 개관 26년째를 맞은 이 시설은 이번 전시 외에도 지금껏 여러 수준 높은 콘텐트를 개최 및 유치하며 산업도시 울산에 예술의 꽃을 피웠다.

먼저 미술관에서는 피렌체 판화 113점이 전시된 ‘유토피아-이탈리아 판화 400년’전이 당시 지방도시 최다 관객인 2만7000명을 유치하는 쾌거를 이뤘다. 삶과 자연을 주제로 한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전도 2만6000명의 유료관객을 모았다. 다른 전시도 평균 1만명대의 관객이 전시를 관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0년부터 열린 지역작가초대전현 우수작가초대전은 울산 출신이거나 울산을 기반으로 하는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는 현대예술관만의 기획전이다. 현재는 울산작가뿐 아니라 전국 유명작가와의 교류를 주선하는 쪽으로 전시내용이 진일보했다.

주변기관과의 연계도 눈여겨볼 만하다. 울산 동구청 및 동구문화원과 문화·예술 진흥 업무협약MOU을 맺고, 동구 옛 명덕·미포마을을 재조명한 ‘산마루골 당산나무’전을 열기도 했다.

◆세계적 소프라노 조수미도 극찬한 공연장

다핵도시인 울산광역시에서 특히 동구는 다른 산업도시와 결을 달리하는 지역이다. 자신을 자본가이기보다 성실한 노동자로 본 고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의 노동자 철학을 이어받은 이유가 크다. 1972년 3월 어촌마을인 울산 동구 미포만에 조선소 기공의 첫 삽을 뜬 후 현대중공업현 HD현대중공업은 향토기업으로 기업이윤을 환원한다는 아산의 정신을 계승, 허허벌판이던 본사 주변에 여러 인프라를 구축했다. 이 중에는 당연히 문화시설도 포함됐다.

아산이 1983년 10월 울산조선소에서 5미터(m) 높이 작업용 타워에 올라가 선박 프로펠러를 검사하고 있던 한 직원과 대화하고 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돕는 것이 나의 오랜 소망”이라는 꿈도 들려줬다. 사진=HD현대중공업
아산이 1983년 10월 울산조선소에서 5미터(m) 높이 작업용 타워에 올라가 선박 프로펠러를 검사하고 있던 한 직원과 대화하고 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돕는 것이 나의 오랜 소망”이라는 꿈도 들려줬다. 사진=HD현대중공업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계속된 투자에 1991년 한마음회관 및 미포회관, 1994년 동부회관과 동부2관, 1995년 서부회관, 1997년 대송회관 그리고 1998년 지금의 현대예술관에 이르기까지 총 7개의 회관이 건립됐다. 건립비용만 700억여원. 수도권이 아닌 지역 특성상 과거 연간 150억원 이상이 인프라 조성 및 시설운영 등에 투자됐다. 이같은 문화나눔은 지역의 문화적 토양을 다지는 동시에 울산이 문화의 도시로 변화하는 데 마중물 역할을 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정경화,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요요 마, 비올리스트 이마이 노부코, 피아니스트 구라모토 유키·마리아 조앙 피레스·백건우·서혜경·조성진, 성악가 신영옥·조수미·캐슬린 김·홍혜경이상 각 부문 가나다순 등이 대공연장964석을 다녀갔다. 무엇보다 실내 음향효과인 잔향殘響이 좋아 소프라노 조수미가 ‘또 서고 싶은 무대’라는 극찬을 했다고 전해진다.

◆예술단체 지원으로 지역문화 이끌어

전시·공연뿐만 아니라 예술단체 지원에도 열중했다. 울산대학교와 협약을 맺어 지난 2007년 창단된 USP챔버오케스트라가 대표적인 예다. 기업이 지원하는 국내 최초 대학 오케스트라로 화제였다. 현대예술관 관계자는 “지원만 17년째고 메세나의 바람직한 상이라는 인정도 받았다”며 “정기적으로 봄과 겨울 연 2회 연주회를 연다”고 말했다. 이밖에 현대예술관은 울산 유일의 아마추어 직장인 오케스트라인 울산현대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울산동구여성합창단·울산남성합창단·현대청소년오케스트라에도 연습장소와 무대를 제공하고 있다.

사진=HD현대중공업
사진=HD현대중공업

‘문화를 나누자’는 뜻에서 주택가와 학교, 병원 등 문화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한 ‘찾아가는 음악회’와 산업현장에서 생산 근로자와의 접점을 찾는 ‘현장콘서트’도 과거 한창 열렸다. 갑진년 각각 24년·22년째 명맥을 이어 온 두 행사에 더해, 저소득층과 장애인이 각종 공연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지역 밀착형 문화나눔이 1998년부터 계속됐다. 울산에 사는 아마추어 연주자들에게 간이무대를 제공하는 ‘로비음악회’는 2001년 처음 시작됐다. 연주기회가 부족한 지역 음악가나 단체에 예술관 1층 로비를 무대로 내놓는 형식이다. 현재 56개의 문화강좌가 개설됐고, 이로써 지역주민의 여가복지와 평생학습, 예술도시 만들기에 기여했다.

HD현대중공업은 2004년부터 2008년까지, 2011년과 2012년, 2013년에 문화·예술지원 기업 1위에 올랐고, 이 기간 동안 2016년까지 2위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다. 직영 예술관을 운영하며 울산 문화발전에 공헌한 노고를 인정받아 2007년 한국메세나대상을 받기도 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예술은 계속된다

울산에 늘 훈풍이 분 건 아니었다. 기반이 제조업인 만큼 도시에도 구조조정이 불어닥쳤다. 회사 부채비율을 100% 미만으로 낮추려 회관들이 하나둘 문을 닫거나 매각이 검토됐다. 이른바 비핵심 자산의 매각과 분사, 경영 합리화 작업과 일부 비효율적인 복지시설의 처분이었다. 한마음회관마저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건물로 바뀌면서, 이제는 현대예술관만이 지역사회와의 매개를 홀로 책임지는 상황. HD현대중공업의 한국메세나협회 순위도 2017년 5위에서 2018년 3위로 회복하더니 2019년 6위·2020년 8위·2021년과 2022년 13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 먹구름이 걷히고, 이제 해 뜰 날이 오는 모양새다. 지난 10년의 불황이 끝나고 조선업에 초호황기가 돌아왔다는 해석이 잇따르면서다. 우선 2021년 기준 HD한국조선해양의 연간 수주 목표액이 152% 초과 달성됐고, 이 기조는 2022년137.3%과 지난해140%까지 이어졌다. 이에 마침내 3년 만에 흑자를 달성, 올해 영업이익이 1조원을 넘길 전망이다.

현대예술관은 지역 중·고등학교 문화소풍 장소로 인기가 높다. 사진=현대예술관
현대예술관은 지역 중·고등학교 문화소풍 장소로 인기가 높다. 사진=현대예술관

상반기 현대예술관에는 세계 3대 소년 합창단으로 불리는 빈소년합창단을 시작으로 배우 박보검의 복귀작인 뮤지컬 ‘렛미플라이’ 등이 무대에 올랐고,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첼리스트 송영훈·피아니스트 양성원의 앙상블 무대가 오는 28일 예고돼 있다. 4월 ‘보사노바의 여왕’ 오노 리사, 5월 피아니스트 구라모토 유키, 6월 ‘부소니콩쿠르 우승’ 아르세니 문 등도 준비됐다.

‘헬로우, 팝 아트’전이 끝나고는 ‘매그넘 인 파리 사진전’이 열린다. 포토 저널리즘의 대명사 매그넘포토스가 조망한 프랑스 파리가 울산에 펼쳐진다. 지난 15년여간 현대예술관의 전시와 공연 등을 담당한 한 관계자는 “문화와 예술은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우리의 노력이 사람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부서 전체가 일하고 있다”며 “난해해 보이지만 쉽고, 독창적인 것이 팝아트지 않나. 시민분들께서 예술관에 향하는 문턱을 낮추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크고 대단한 예술이 아닌, 일상 속 예술. 삶과 사회를 치유하는 예술. 울산 동구 조선소 옆에는 예술관이 있다. 워홀의 ‘플라워’처럼, 봄이 왔으니 다시 꽃망울이 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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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파이낸셜투데이 김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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