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궁 전 CJB청주방송 대표이사

이궁 전 CJB청주방송 대표이사
이궁 전 CJB청주방송 대표이사

“술을 많이 마시고 취할래, 적게 마시고 취할래?”

세계적인 간 박사 독일 본 대학의 이종수 평생교수는 지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술을 마시게 될 경우 가끔 폭탄주를 권했다. 가급적 알코올 섭취를 줄이되 취하는 건 빨리하자는 논리에서다. 폭탄주는 맥주에 들어 있는 탄산의 영향으로 인체에 빨리 흡수돼 마시는 사람을 금방 취하게 만든다고 한다. 또 이른바 ‘원샷’(one shot)으로 마시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일반적으로 음주량이 많아지게 된다. 물론 절제된 음주가 됐을 경우 이 박사의 설명대로 경제적으로나 건강상으로나 유리할 수 있다. 필자는 지혜롭게 술을 마시자는 그의 주장이 옳기를 항상 기대해 마지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폭탄주 시비에 휘말렸다. 부산 엑스포 유치 활동차 프랑스 파리에 갔다가 재벌총수들과 폭탄주 파티를 했다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파리의 한 한식당 2층 단독 룸에서 재벌총수들과 저녁 식사를 했다. 삼성전자와 SK, 현대차그룹, 엘지(LG), 롯데그룹 회장 등 재벌총수들이 참석했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비공식 일정이었다.

5대 그룹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실의 요청으로 수행원 없이 총수들끼리만 참석했다. 식당 예약 등 준비도 대통령실에서 했고, 저녁 8시에 시작해 밤 11시까지 술을 곁들인 저녁 식사를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엑스포 유치를 위해 ‘대통령 특사’로 임명된 재벌총수들과 엑스포 유치가 결정되기도 전에 폭탄주를 마신 셈이다.

술자리가 있었던 24일은 대통령이 2박 3일의 일정을 마치고 파리를 떠나 한국으로 향하기 전날이다. 대통령에게는 ‘뒤풀이’ 격이었지만 회장단은 다음날에도 유치 활동을 이어갔다. 이 관계자는 “막판까지 엑스포 유치에 노력해야 할 시간에 술자리를 한 것이어서 국민 눈높이에는 맞지 않는 행동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엑스포 유치는 박빙으로 결선에서 역전할 것이라는 정부 전망과 달리 1차 투표에서 실패했다.

하룻밤의 술자리 때문에 엑스포가 실패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 윤 대통령 입장에서는 엑스포 유치를 위해 노고를 마다하지 않은 재벌총수들을 위로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술 한잔한 게 뭐 그리 대순가. 이런 ‘선의’(善意)가 있는가 하면 이건 ‘있어서는 안 될 일’이란 경계도 있다.

다시 폭탄주 얘기로 돌아가 보자. 아일랜드 어부들이 어로에 나서기 전 추운 몸을 빨리 덥히기 위해 위스키에 맥주를 섞어 마시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러시아 시베리아의 벌목공들이 역시 추위를 피하기 위해 보드카에 맥주를 섞어 마시기 시작하면서 유래했다는 얘기도 있다. 우리의 경우 검사 출신 유명 정치인 한두 명이 스스로 제조 원조라고 주장하고 나섰지만 부질없는 소리 같고 오래전부터 선조들이 더러 혼합주를 즐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연말연시는 폭탄주의 계절이다. 모임의 좌장이 “한잔 말지” 하면 일은 시작된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선창에 “아니여 아니여, 가족이여”라는 맞장구가 이어진다. 파리의 폭탄주 자리에서는 “심조! 간윤!”이 외쳐졌음직도 하다. “심장은 조국(祖國)에, 간은 윤통에게”라고. 문제는 여기서 심각해진다. 폭탄주가 알코올을 적게 먹기 위한 게 아니라 술에 많이 취하기 위한 술이 되는 것이다. 술이 술을 부르고 잔이 잔을 이어간 끝에 결국은 사달이 일어난다. 불상사가 벌어지고 회복할 수 없는 후유증도 남긴다.

“술은 만악의 근원이다” “석 잔을 넘기지 않으면 보약이지만, 그 이상이 되면 독약이다” “술은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다”. 권위주의 시절 회현동 회림 사건이 그랬고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도 그랬다.

86년 3월21일 저녁 서울 회현동의 한 요정에서 하나회 핵심 군 장성과 여야 국회의원들이 취중 난투극을 벌였다.

신민당 총무였던 김동영이 “힘 있는 거물들은 안 오고 똥별들만 먼저 모였구먼…” 하고 내뱉은 게 화근이었다. 한 시간 뒤 이세기가 도착하자 참모차장 정동호가 “어이 ‘이 새끼’ 총무 뭐 이렇게 늦게 오고 그래, 그러니까 야당이 우릴 보고 똥별이라고 하지 않나”라고 윽박질렀다. 이어 일부 군 장성들이 ‘이 새끼’를 김동영 앞에 끌고 가 꾸짖었다. 기자 출신의 남재희가 분을 못 참고 벽으로 유리컵 2개를 내던졌다. 파편이 튀어 한 장성의 왼쪽 눈덩이가 찢어지는 바람에 피가 철철 흘렀다. 남재희 얼굴에 발길이 날아들었고 체격이 작은 그는 혼절했다. 술자리는 순식간에 서로 엉켜 주먹과 발길질이 오가는 난투장으로 돌변했다.(미디어빌)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은 99년 6월 한 검찰 고위 간부가 오찬에 폭탄주를 마신 뒤 기자들에게 “조폐공사 파업은 검찰이 유도했다”고 한 발언이 발단이 됐다.

공기업 구조조정에 대한 노조의 반발에 쐐기를 박는 사례를 만들기 위해 검찰이 의도적으로 파업을 유도했다는 발언은 당시 정부의 도덕성 시비와 함께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이 발언은 대전 법조비리 등으로 흔들리던 검찰 조직에 결정타가 돼 결국 김태정 당시 법무부 장관이 임명 8일 만에 경질되는 파장을 낳았다.

앞 얘기는 술 때문에 감정들이 격해져 폭력이 난무했던 일이고 뒷 사건은 검찰 간부가 술김에 기자들에게 검찰의 노조제압 비밀작전을 털어놨다가 일이 커진 경우다.

‘영업사원 1호’가 애주가라는 게 나쁠 것까지는 없다. 다만 문제는 호방한 성격의 그가 재벌총수나 기타 일반인들과 도를 넘는 주연을 가질 경우다.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술기운에 기분이 좋아져 서로 호형호제하며 말을 트고 할 말 못 할 말을 주고받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정경유착이란 말이 어려운 말이 아니다. 어울리고 가까이 지내다 보면 필연적으로 ‘선’(線)을 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권력자의 몸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는 이미 물음의 대상이 아니다. 국가 지도자급 권력이 아니더라도 판검사나 일선 경찰도 원고나 피고, 피의자, 민원인들과 사적인 접촉을 하면 안 된다.

문재인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일한 한 관계자는 “대통령이 재벌총수들과 비공식적으로 술자리를 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며 “공개적인 자리를 갖는 것도 걸맞은 내용과 형식을 갖추고 이를 국민에게 알리는 게 맞다”고 말했다.

또 이창민 한양대 교수는 “윤 대통령이 재벌총수들을 피의자처럼 생각해 자꾸 동원한다는 느낌이 든다”고 못마땅해했다. 그는 “정치인이 기업인들을 자주 만날수록 이들에게 정부 사업을 수주하거나 규제 회피 등을 얻게 해 정경유착이 강화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면서 “비공식 자리는 지양하고 공식 자리도 명확한 의제를 설정해 갖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겨레가 전한 비판들이다.

너무나 온당한 지적이다. 공식적인 식사 자리에서 한잔하는 반주라면 몰라도 취기를 이용해 우의를 도모하고 술 자체를 즐기자는 폭탄주 돌리기는 금기 중의 금기가 돼야 할 것이다. 술이란 분별없이 주고받을 경우 결국엔 숨겨야 할 일을 모두 남에게 발설하는 어리석음을 가져오게 한다 해서 자고이래 항상 경계의 대상이 돼 왔다. 국가 최고 권력자와 재벌의 관계는 문자 그대로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이 돼야 한다.

지금은 다소 시들해졌지만, 80년대에서 90년대까지 군 출신들이 세상을 쥐락펴락할 때는 폭탄주 열풍이 온 나라를 풍미했다. 폭탄주 광풍이 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혼술을 하는 사람도 폭탄을 만들어 먹을 정도. 이 폭탄주 열풍은 북한에까지 전파됐다. 당시 남북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남쪽의 음주문화가 북녘까지 퍼졌던 것이다. 서울에 오는 북한 인사들도, 평양에 가는 남쪽 사람들도 모두 폭탄주를 돌리며 한 동포임을 외쳤다.

서울을 찾은 외국인들도 폭탄주에 빠지기는 마찬가지. 특히 일본인들은 서울에 가서 폭탄주(박탄슈)를 마시지 않았다면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시절은 다시 연말연시. 폭탄주가 유행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동창회나 각종 송년, 신년 모임에서 폭탄주가 대세가 되고 있다. 재료는 양주 대신 소주가 ‘뇌관’이 되는 ‘소폭’이 인기다. 코로나 이후 고단해진 서민들이 비교적 값이 싼 소주와 맥주를 섞은 한잔 술에 시름을 달래고 있다. ‘소폭’ 혹은 ‘소맥’이라는 명칭도 일반에 친근하다.

폭탄주는 ‘양폭’이든 ‘소폭’이든 문자 그대로 ‘폭탄’(bomb)이다. 가급적이면 피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보호하고 가족을 건사하고 사회를 지탱한다. 여기서 하나 더. 폭탄주에 음주운전까지 곁들여진다면, 그건 폭망이다. 생각해 봐라, 끔찍하다. 폭탄주는 결국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부자와 빈자, 권세가와 민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권부가 흐느적거리면 나라도 휘청거리게 된다. 폭탄주를 멀리하라. 폭탄주는 ‘폭탄’이다.

<외부 필자의 기고와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침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파이낸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