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 전 한국선거학회 회장

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 전 한국선거학회 회장.
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 전 한국선거학회 회장.

한국 정치는 ‘극단적 양극화’라는 덫에 빠져 있다. 이러한 덫에서 벗어나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정치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의원들의 인식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 있어야 한다. 의원들이 계파와 지역이 아니라 국민과 자신에게 줄을 서고, 국민이 요구하고 체감하는 정책에 몰입하며, 국민의 편에 서서 여야가 함께 행정부를 견제하면 국회 정상화가 앞당겨지는 길이 열릴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의회정치 학자인 쉡슬리와 웨인개스트(Shepsle and Weingast)는 ‘구조 유인 균형 상태’(structure-induced equilibrium)’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울타리를 높게 쌓아놓고 쪽문을 하나 만들어 놓은 다음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험으로 몰아세우면 그들이 취하는 행위는 쪽문으로 향하는 것밖에는 없다”는 비유를 들어 이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울타리는 구조에 해당하는 것이고 쪽문을 향해 가는 행위는 생존을 위한 전략으로 해석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기형적인 국회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의원들은 생존하기 위한 퇴행적 적응 능력만을 키우게 된다. 이와 더불어 정당이 국회를 지배하는 기존의 왜곡된 정치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국회 내 정당 양극화는 해소되기 힘들다. 사회 갈등 해소라는 국회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정치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과제는 국회의 구조, 절차 및 규칙의 개혁을 넘어 비대화된 중앙당 구조, 당 대표의 권력 독점, 강제적 당론, 패권적 계파 정치가 판을 치는 원외 중심 정당 체제를 원내 중심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원외 중심 정당 체제는 의원 자신들이 선출한 원내대표보다는 당원과 국민이 선출한 원외 대표가 중앙당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면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체제이다. 이러한 체제는 궁극적으로 한국 정당이 인물 중심과 지역주의 정당으로 고착화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비록 2002년 대선 이후 당권․대권이 분리되고, 제왕적 총재 체제가 종식되었다고 하지만, 한국 정당은 여전히 ‘제도화된 권력’이 아니라 당 대표 또는 소수 실력자들에게 권력이 독점되어 있는 ‘개인화되고 중앙집권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당 대표와 일반 의원들 간의 관계는 수직적인 형태를 띨 수밖에 없고, 일반 의원들은 국회직보다는 당직을 선호하고, 의정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소신보다는 당의 지시와 명령을 따르는 퇴행적 구조가 존속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당 대표가 특정 법안이나 현안에 대해 자신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밀어붙이면 개정을 추진 중이던 법안이 별안간 중지된다. 또한, 당 대표가 갑자기 당론을 정하면 모든 정당 구성원들이 이의 없이 이를 따르는 후진 정치가 반복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원외 정당체제에 의한 인물중심․지역중심 정당체제는 한국의 정치 갈등을 생성․유지․증폭시키고 있다.

반면 원내 중심 정당이란 국회가 정당정치의 중심 무대가 되고 의원들이 원외 당 조직으로부터 자율성을 유지하며 정당의 구심점과 정당 간 대립구조의 핵이 국회에 위치하는 경우다. 임성호 경희대 교수는 “탈산업화와 세계화로 사회의 복잡성이 파편화되고 정당이 권위적 조정 기제로 작동하지 못하며 유권자의 정치 선호도도 가변성이 높게 되는 상황에서는 분점정부의 출현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는데 이러한 시대 변화 상황에서 원내 정당화는 의원 개개인의 자율성을 증대시켜 대통령과 의회, 여야 정당 간의 교착상태를 완화시키는 순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는 견해를 편다.

원외 정당 체제는 당원의 권리와 지구당을 중시하는 유럽식 대중 정당 모델과 맥을 같이하고. 원내 정당 체제는 당원보다 지지자를 중심으로 하는 미국식 모델이다. 이런 미국 정당 모델에서 지구당(local committee)은 존재하지만, 그 기능과 역할이 제한적이다. 최근 정치권에서 지구당 부활 찬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지구당은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이 수백억 원의 불법 정치 자금을 수수한, 이른바 ‘차떼기 사건’을 계기로 2004년 3월 12일 고비용 정치 구조를 혁파한다는 의미에서 폐지됐다. 중앙당과 특별시, 광역시, 도 단위의 지부 정당만 존재하고 지구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야 차기 유력 대권 후보들이 지구당 부활에 불을 지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5월 23일 부산의 ‘당원 주권 시대’ 콘퍼런스에서 “지구당 부활도 중요한 과제”라고 했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차떼기’가 만연했던 20년 전에는 지구당 폐지가 ‘정치개혁’”이었지만 “지금은 기득권의 벽을 깨고 정치신인과 청년들에게 현장에서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지구당을 부활하는 것이 ‘정치개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선 이 대표의 강성 지지층인 개딸이 지배할 수 있는 지구당 부활은 당 대표 연임을 위한 장치로 보고 있다. 한편, “한 전 위원장은 정치적 기반이 없기 때문에 원외 세력들에게 현역과 비슷한 정치 활동의 법적 권한을 줘서 이들을 아군 삼으려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차기 국민의힘 당 대표 경선에 참여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지구당이 부활하면 지역구 단위의 사무실과 유급 직원 운영이 가능해지고, 정당 경상보조금도 지구당으로 보낼 수 있고, 지역구 단위로 후원금도 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국회의원이 아닌 당협(지역)위원장이 사무실을 합법적으로 두고 지역구 활동을 하면서 차기 선거를 대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 전 위원장이 지구당 부활을 “정치영역에서의 ‘격차 해소’”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한편, 반대하는 사람들은 지구당 부활은 정치개혁이 아니고 사적 이익을 취득하기 위한 것이라는 논리를 제시한다. 이재명 대표와 한동훈 전 위원장이 지구당 부활 카드를 꺼낸 이유는 ‘당권’을 강화해 ‘대권’으로 나아가기 위한 초석이라고 주장한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구당을 만들면 당 대표가 당을 장악하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그게 국민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냐”며 반대 의견을 밝혔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개딸 정치를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다”며 “정치 부패의 제도적 틀을 다시 마련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지구당이 폐지되면서 현역 의원은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다른 정치인들에게는 공정하지 않은 상황은 개선돼야 한다. 하지만 과거와 같은 형태의 지구당 부활은 정답이 아니다. 지구당이 주민들의 여론 수렴과 당원 활동을 원활히 하기 위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미국처럼 철저히 공조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미국에서 지구당 위원장은 오직 경선을 관리하고 당을 홍보하며 정치 신인을 충원하는 역할에 치중할 뿐 선거에 출마하지 않는다. 따라서 원외 인사와 공정한 경쟁을 하기 위해 현역 의원은 지구당 위원장이 될 수 없다.

향후 지구당이 부활된다면 현역 의원과 비현역 원외 인사 모두에게 차별 없이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더불어 지구당 부활 논쟁을 ‘현역 대 원외 당협위원장’간의 공정성 문제와 특정 정치인의 유불리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한국 정당정치를 정상화시키고, 의회가 효율적으로 운영되기 위해 미국처럼 지지자 중심의 원내정당으로 자리 잡을 것인지, 아니면 당원들의 뜻에 따르는 대중 정당의 길을 갈 것인지 한국 정당의 발전 방향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논쟁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지구당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정치개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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