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미술관서 내달 16일까지

 ‘구산팔해(九山八海)’(2023-24, 캔버스에 혼합 재료, 91.5 X 183센티미터(cm), 강이경). 사진=금호미술관
 ‘구산팔해(九山八海)’(2023-24, 캔버스에 혼합 재료, 91.5 X 183센티미터(cm), 강이경). 사진=금호미술관

보이지 않는 구조 아래 숨겨진 세계를 탐색하고, 악몽을 풍경으로 공포와 희열을 동시에 담아내며, 종이를 으깨고 이어 붙여 종이로 된 성벽을 세운다. 사유적이고, 자유로우면서 강렬하고, 내피와 외피가 있다. 이런 3인 3색의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사간동에 한자리에 모였다. 오는 6월 16일까지 금호미술관은 지난해 제21회 금호영아티스트 공모에서 선정된 작가 6명 중 강이경·왕선정·임선구이상 가나다순의 신진 지원전인 ‘2024 금호영아티스트’전 2부를 연다.

버려진 공간과 지하 세계의 암흑 물질Dark Matter처럼 현실 속 보이지 않는 공간을 향한 관심을 회화와 판화적 실험, 설치 작업 등으로 풀어낸 강 작가의 전시 제목은 ‘우로보로스의 조각들Altered Existences in Ouroboros’이다. 우로보로스의 뜻은 ‘꼬리를 삼키는 자’. 뱀이나 용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삼키는 형상을 의미하는 말로, 무한대 또는 인간의 마음씨를 나타낸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지도학과 우주론 그리고 불교 철학을 다룬 연구와 함께 2021년 샌퍼드 지하연구소SURF 레지던시 프로그램에서 그가 실제로 경험한 지하 세계 및 협업을 통해 추출한 자료를 재해석한 평면 작품 31점과 벽화 1점, 설치 작품 2점을 관람객에게 선보인다.

지난 10일 금호미술관에서 만난 강 작가는 내비게이션이 오류로 글리치를 일으키면서 순간 우주 공간이 보였고, ‘그럼 내 발밑은?’에까지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 시작이었다고 시발점을 밝혔다.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내부 구조에 관한 관심과 그 세계관을 보여 주는 벽화 ‘웰컴 투 우로보로스 월드Welcome to Ouroboros World2024, 발광다이오드LED 디지털 조각과 흙, 돌 등으로 구성한 설치 작업 ‘우로보로스’2024 등으로써 작가는 전통적이며 건축적인 기존의 개념과 형태에 질문을 던진다. 또 이 중 일월오봉도에 영감받은 ‘구산팔해九山八海2024는 세상을 지상 세계와 지하 세계, 그 가운데 사이 공간으로 보는 강 작가의 인식관이 반영된 작품.

‘미지의 세계를 알려는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한 그는 “한동안 다른 학문과의 협업에만 집중하다 금호 전시로 오랜만에 회화에 돌아왔다. 이 시각적 언어로의 복귀 과정이 나에겐 소중한 경험이었다”며 “움직이는 형상과 회화를 일시에 선보이고 ‘드디어 해냈다’ 싶었다”고 했다.

왕선정 개인전 ‘나는 나는 법을 배웠다(I learned how to fly)’ 전경. 오른편에 걸린 그림이 ‘환영해요’(2024, 캔버스에 유채, 194 X 290센티미터(cm), 왕선정)다. 작가의 회화는 인간이자 예술가로 살아가며 마주하는 공포와 희열을 함께 함축하고, 보는 사람의 내면에 숨겨진 겁, 그늘, 연약함 등의 감정 및 정서를 자극한다. 사진=금호미술관
왕선정 개인전 ‘나는 나는 법을 배웠다(I learned how to fly)’ 전경. 오른편에 걸린 그림이 ‘환영해요’(2024, 캔버스에 유채, 194 X 290센티미터(cm), 왕선정)다. 작가의 회화는 인간이자 예술가로 살아가며 마주하는 공포와 희열을 함께 함축하고, 보는 사람의 내면에 숨겨진 겁, 그늘, 연약함 등의 감정 및 정서를 자극한다. 사진=금호미술관

그가 경험하고 인식한 삶의 모습을 캔버스에 녹이고, 결국 그 고통을 직시하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희망을 품은 왕선정 작가는 신화적 모티브와 종교적 도상을 활용하거나 변형 혹은 왜곡된 인물 표현을 통해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 나약함을 드러내는 작가다. 조류, 천사, 반인반수 등의 꼴과 뒤틀린 몸을 하고 괴로워하면서도 그림을 그리는 인물은 공포와 불안이 지배하는 현실 세계와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 날아오르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를 반영한다.

“매일 악몽 속에서 나는 픽픽 쓰러지면서 매스껍고 토할 것 같은 불쾌감을 꼭 현실과 같이 느끼곤 한다. 그래서 언제인가부터 스스로 꿈속에서 나는 법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매일 반복되고 도망칠 수 없는 악몽을 꾸며 이렇게 생생하게 고통을 느껴야만 한다면 차라리 날아올라 버리자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처럼 아주 조금씩 땅에서 발을 띄웠다 떨어지길 반복하면서 이내 조금씩 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갔다. 그러다 끝내 날아올라서는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온갖 괴물들이 나를 찾아 웅성이고 북적이는 걸 보며 나는 희열을 느낀다.”(왕 작가 노트 중)

그래서 전시명도 ‘나는 나는 법을 배웠다I learned how to fly’다. 이 개인전에서 그는 강렬한 색채와 특유의 묘사력으로 악몽 속 풍경의 장면을 그리며 본인의 감정과 조형적 미감을 자유로이 표출한 회화 작품 15점과 뜨개질 및 자수 작품 2점을 내놓는다. ‘환영해요’2024의 경우 캔버스는 하나지만 그 안에는 메시아와 지옥, 벼랑 끝에 선 외로운 작가가 서로 공존해 있다.

왕 작가는 “이를 뽑고 나면 그 상처가 간질간질해서 자꾸 씹고 싶지 않나. 씹으면 상처는 안 낫지만 오히려 시원한데, 그런 느낌이었다”며 “그게 치유는 아니었지만 나를 안에 그리고 자기 확인하는 과정이 재밌었다. 앞으로 또 다른 방식으로도 나를 그려 보고 싶다”고 말했다.

미술관 3층을 쓰는 임 작가의 전시명은 ‘축성법A castle built of dust’이다. 종이와 흑연을 기반으로 개인적 경험과 기억, 타자와 공동체의 이야기를 엮어 층위를 만들던 그가 이 전시에서는 출처가 다른 다양한 종이를 모으고, 으깨고, 이어서 두 성벽 ‘바람 벽’2024과 ‘기대는 벽’2024을 세웠다. “소재 특성상 작업물의 내구성 지적을 그동안 많이 받았는데, 이 완벽한 파괴가 물성을 더 견고히 했다”는 것이 임 작가의 설명이다. ‘바람 벽’이 외벽이라면 ‘기대는 벽’은 내벽이다. 강정하 선임큐레이터는 “가로 13미터m가 넘는 대형 작업이며, 총 17개의 종이 벽이 서로를 의지하고 있다”며 “위태로우면서도 견고해 보이는 게 특징”이라고 이 벽을 설명했다.

작가는 공간을 점유하는 거대한 종이 성벽이 나와 우리의 언저리를 투영하며 삶을 반추하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나와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의 여러 장면을 바라보려 애쓰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유치한 표현일 수도 있는데, 모래성을 쌓는다는 표현을 그간 자주 썼어요. 전시 기획서를 쓸 때도 땅에서부터 솟아나고 지반을 밟고 일어서는 식의 표현을 썼고요. 그 안을 잘 들여다보고 있는지 질문이 생겼고, 밑바탕인 종이를 다시 견고한 상태로 구축해야겠다는 생각에 만든 벽들입니다.” 공간이 곧 종이라는 그는 지난 5~6년간 그린 드로잉 북을 1층에 가져왔다며, 벽은 그 책을 바깥에서 감싸는 존재인 만큼 둘 모두를 감상해 달라고 부탁했다.

‘기대는 벽’(2024, 종이·모래·스티로폼·흑연 및 혼합 재료, 가변 설치, 임선구). 사진=금호미술관
‘기대는 벽’(2024, 종이·모래·스티로폼·흑연 및 혼합 재료, 가변 설치, 임선구). 사진=금호미술관

금호영아티스트는 2000년대 중반 미술계에서 펼쳐진 젊은 작가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활동이다. 새로운 것을 모색하고 젊은 시선에 주목하고자 한 당시 미술계 흐름의 한 축을 형성했다고 평가받는다. 총 21회 공모를 통해 95명의 작가를 발굴, 개인전 개최를 지원했다.

파이낸셜투데이 김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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