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우리나라 정치판에서는 막말이 판을 친다. 외국의 정치계에서는, “이 거짓말쟁이!”라는 말만 해도 모욕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정도 발언해서는 막말 축에 끼지도 못한다. 그 정도로 우리나라 정치판의 막말 ‘수준’은 높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정치판에서는 왜 이렇게 수위 높은 막말이 판을 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특정 정당의 정치인들이 막말을 시리즈로 하면, 중도층의 표를 흡수할 수 없어, 해당 정당이 선거에서 어려움을 겪을 확률은 높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정당이나 정치인은 말을 조심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지금도 막말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것을 보면, 이런 이론적 분석은 별 효용가치가 없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과 같이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도 막말이 난무하는 이유가 더욱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추려질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계몽주의’가 지배하는 정당에 속한 구성원들은 막말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계몽주의가 지배하는 정당은, 유권자들을 ‘계몽’하면 유권자들이 자신들의 뜻을 따라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주당이 이런 계몽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보여주는데, 민주당이 이런 성향을 보이는 이유는, 민주당 구성원들의 상당수가 운동권 출신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이들이 학생운동, 민주화운동을 할 당시에는 이런 ‘계몽주의적 사고’가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 사회적 상황은 당시와는 완전히 다르다. 계몽주의는 집단주의와도 그 맥이 닿아 있는데, 우리가 살고있는 현대 사회는 집단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개인적 이익이 주요 갈등의 요소로 등장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사회는 변했건만, 아직도 이런 계몽주의적 사고에 젖어있는 정치집단은, 지금도 유권자를 계몽하면 자신들의 뜻을 따르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해, ‘계몽의 극단적 형태’인 막말을 통해 자신들의 증오를 전달하려 애쓰는 것이다.

여기서 두 번째 원인이 도출된다. 바로 증오다. 정치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감정이 개입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을 증오도 할 수 있고, 반대로 특정 정치인에 대해 과도한 애정을 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적 과정은 ‘시스템’이기 때문에, 이성이 지배해야 정상이다. 즉, 정치인의 감정이, 이성이 지배하는 시스템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정치라는 이름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중요 ‘기둥’인 정당이, 그 구성원의 감정 분출을 통제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 정당은 ‘감정 분출을 위한 집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정당이 이렇게 되면, 정당은 공당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정당의 상태가 이렇게 되면, 정당 구성원들의 막말은 봇물 터지듯 나오게 된다. 그런데 정당이 이런 상태에 처하게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정당이 강성 지지층들의 눈치를 보게 되면 상태가 이 지경이 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여기서 세 번째 이유가 도출된다. 바로 팬덤의 존재가 그것이다. 팬덤은 정치를 ‘감성화’시킨다. 감성이 지배하는 예술 분야에서 팬덤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예술 분야는 본래 감성이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런 세계에서는, 어떤 특정 연예인, 예술가를 왜 좋아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좋다’고 말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성이 지배해야 하는 정치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이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자신이 어떤 정당이나 정치인을 좋아하는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냥 좋다’는 식의 언급은 통용될 수도, 통용돼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정치인 팬덤들은, 해당 정치인을 추종하는 뚜렷한 이유가 있다고 강변할 것이다. 자신은 특정 이념 지향성을 갖는데, 자신이 추종하는 정치인이 바로 그런 이념 성향을 잘 대변해 줘서 해당 정치인을 믿고 따른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 동의하기는 힘들다. 정치인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특정 이념의 ‘화신’이 될 수는 없고, 그렇기 때문에 특정 이념 지향성을 가진 유권자들이 ‘맹목적’으로 특정 정치인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논리적 타당성을 갖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가 잘못했을 때에는, 가차 없이 그를 비판하고 꾸짖고, 지지를 철회해야 정상이라는 말이다. 또한 아무리 특정 이념 지향성을 가진 유권자 혹은 특정 정치인의 팬덤이라고 하더라도, 자신과 다른 이념을 가졌거나, 자신이 추종하는 정치인의 반대편에 있는 정치인이나 정당을 ‘증오’해서는 안 된다. 정치적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만 이성적인 태도다.

그런데 ‘우리’와 ‘그들’을 나눠서 상대를 ‘적(敵)’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이성의 영역을 벗어났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다. 이렇듯 정치를 감정적으로 바라보는 집단이 존재할 경우, 그리고 이들이 상당 수준의 영향력을 가지게 될 경우, 정치적 토양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으로 변하게 된다. 정치적 토양이 이렇게 변하면, 그 토양에서 자라나는 ‘정치’는 감정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특히 특정 정당이 이런 감성화된 집단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될 경우, 이성적 판단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쉽지 않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인들이 앞다퉈서 막말을 하게 되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현상은 아닌 것이다.

결론적으로 막말은 ‘정치의 감성화’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막말을 정치판에서 추방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감성화된 정치를 다시 이성적 영역으로 돌려놓는 것이다. 문제는 일단 감성화된 정치를 이성의 영역으로 원상회복 시킬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정치와 사회적 현상에는 관성이 있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언론이 끊임없이 이런 문제를 지적하면, 상황이 조금씩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정치는 추종의 대상이 아니라, 이용의 대상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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