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궁 전 CJB청주방송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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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를 부추기며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우리의 정치문화가 바뀔지도 모르겠다. 여야의 윤재옥-홍익표 두 원내대표가 지난달 24일 국회 본회의장과 상임위원회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악습을 그만두기로 했다. 상대를 향한 야유나 고성, 막말 피켓을 통한 항의를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또 대통령 시정연설이나 여야 교섭단체대표연설 시에도 자리에 앉아 있는 의원들이 소란을 일으키는 발언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만시지탄의 아쉬움이 인다. 매체들은 이를 ‘신사협정’(紳士協定)이라고 표현하면서 이 약속이 지속될지는 불투명하지만, 앞으로 기대를 해 보자고 했다.

언론이 표현한 ‘신사협정’이란 말이 거슬린다. 누가 ‘신사’란 말인가? 정말 ‘토관과 신토(土官과 紳土)’ 같은 말씀들하고 계신다는 반응, 시니컬하다. 사람 됨됨이나 몸가짐이 점잖고 교양이 있으며 예의 바른 남자, 혹은 보통 남자를 대접하여 부르는 말이 ‘신사’라는 단어다. 영국이 연상되고 젠틀맨이라는 단어도 떠오른다. 언어적 질감은 다르지만 ‘선비’라는 단어도 생각된다. 우리의 국회의원들이 신사이고 선비일까? 모르긴 몰라도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동안 너무 데어서, 미안하지만, 그렇게 쉽게 대접할 수 없다.

오래전 스스로 대통령이 됐던 어느 ‘스트롱맨’(strongman) 부부를 겨냥했던 한 유머 작가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일석이조가 됐다. 신사답지 않은 신사에 대한 조롱이라는 의도치 않은 소득까지. 이제부터는 신사가 아니라 ‘신토’(紳土)다.

그간의 우리 국회 모습, 어떠했는가? 삿대질과 고성, 야유와 막말, 조롱이 아무렇지도 않게 연출돼 왔고 또 그렇게 해야 의무를 다하는 것인 양, 의정활동을 잘하는 것인 양 우쭐대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국민을 대신해서 국정을 살피라는 ‘국민대표회의’ 본회의장 모습이 실망을 넘어 절망스러웠다. 국민들의 마음이 편하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 이번 국회 마지막 대정부 질문장의 모습이 바로 그랬다. 국민의 대의기관이 저잣거리 싸움판으로 변했다.

국회라는 데가 어떤 곳인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아무나 들어와서 서로 삿대질하면서 내키는 대로 목청을 높이는 곳은 아니다. 대의의 전당답게 더없이 엄중해야 할 곳이다. 품격과 법도, 예의와 성심이 있어야 하는 장소다.

국회의 대정부 질문이라는 것도 그렇다. 우선 국무위원 불러다 망신 주고 조롱하는 일은 사라져야 한다. 단상에 나온 국무위원들도 안하무인의 무성의로 일관해서는 안 된다. 절제된 감정과 언어로 서로를 예우해야 한다. 피차 감정을 싣고 싶은 말이 왜 없겠는가. 제발 싸울 땐 싸우더라도 다들 품위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특히 일부 무지몽매해 보이고 방자하기까지 한 국무위원들은 크게 반성해야 한다. 낮아도 한참 낮고 겸손해도 끝없이 겸손해야 할 공복(civil servant)의 자세가 아니다.

민초들이 여의도 의사당에 기대를 접은 지는 이미 오래다. 민생 관련 법안이 산더미 같아도 정치싸움 이외엔 남의 일이다. 여야를 가릴 것 없다. ‘착각은 자유’라는 말이 있지만 지지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데 서로 옳다고, 너도나도 국민 편이라고 우기면서 많이들 지겨워하는 그 얼굴들을 매일 TV 화면에 들이밀고 있다. 스스로 말발깨나 있다고 자랑스러워하는 의기양양한 얼굴을 한 채.

‘무노동 무임금’도 노동자들에게나 해당하는 얘기가 돼버렸다. 이대로 가다 간 국회 무용론이 나오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다. 이미 서울 서초동과 광화문 네거리에는 주말마다 많은 인파가 몰려 ‘대의’ 아닌 ‘직접’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다. 민주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특권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고, 의원 보수체계를 바꿔 세비를 확 깎아야 한다는 주장도 커지고 있다. 보다 못한 국민들이 절망감 속에 내놓는 지적들이다. 국회 개혁을 얘기하자는 것도 아니다. 특권도 좋고 ‘평생직장형’도 좋다. 국민대표회의가 우선 최소한의 품격과 의무를 지키라는 것이다. 나라 체면, 국민들 체면도 좀 생각해 달라는 것이다. 그래야 세금 내는 국민들이 조금이라도 덜 억울할 것 같다는 얘기다.

이제 변한다고 하니 두고 볼 일이긴 하지만, 그동안 우리 국회의원들, 그들은 신사도 아니고 선량도 아니었다. 신사라기엔 행동거지가 너무 천박했고, 선량(選良)이라기엔 너무 무책임했다.

자, 이제 여야 서로에게 아무 득이 안되는 정치 현장의 ‘노이즈’를 걷어내 보자. 몸싸움부터 불필요한 짓이다. 다수결 원칙을 충실히 지키면 될 일들을 가지고 육탄전을 벌이는 것은 난센스다. 서로의 체통만 떨어뜨리는 소란이자 바보짓이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건 아날로그 시대의 논리다. ‘민의’를 왜곡시키지 말라. 표결은 일종의 ‘수담’(手談)이다. 그보다 확실한 민의가 어디에 있는가. 억울하면 선거에서 이길 일. 또 정말 문제가 있어 통과돼서는 안 될 법안이라면 대통령 거부권이라는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다. 다수당도 무리한 법안이라면, 그것이 사회정의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마냥 몰아붙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국민이 보고 있지 않은가. 피차 상대편에서 반대할 명분이 없는 정의로운 법안을 내라.

그리고 한 발 더. 어차피 서로 싸울 요량이라면 좀 큰 아젠다를 가지고 덤벼라. 국리민복을 위해, 공의(公義)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건실한 공적 담론’을 가지고 싸우라는 얘기다. 이를테면 경기도 김포시의 서울 편입 문제, 논쟁거리가 무궁무진하지 않은가. 상대당 정치인 부인과 관련된 법인카드 문제가, 해외 순방 중의 영부인 명품매장 방문 여부가, 과연 국회의원들 간, 정당 간 싸움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말이다. 싸움 자체가 민망하고 졸렬하다. ‘내로남불’이 따로 없다. 누구를 역성들고 옹호하자는 게 아니다. 법을 어긴 일탈이 있다면 이런 문제는 어차피 사법당국에서 처리할 일이다.

마침 한 언론에서는 검찰의 방만한 기밀비 사용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공직사회에 보다 더 큰 고질적인 문제들이 많다는 것. 이른바 ‘고교 동창 스폰서 사건’의 전 부장검사가 자신이 근무하던 검찰청 근처 은행에 비정기적으로 수백만 원의 현금을 입금한 뒤 사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확인됐다고 한다. 검사들이 마치 월급처럼 특활비를 나눠 썼다는 것인데 공수처가 그 내막을 들여다볼 예정이다.

공직자들이나 그 주변이 한 점 부끄럼 없는 처신을 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덕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법이 관행처럼 이어지고 있다면 그걸 그대로 두고 볼 일은 아니다. 죄의식(sense of guilt) 없이 행해지는 이런 부조리는 관변에 수없이 많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법과 제도가 애매하거나 부실하다면 이를 정비해야 한다. 국회가 할 일이다. 누구 망신주기식, 마녀사냥식 정쟁을 연출하는 건 결코 공동체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자 그대로 저질 싸움, 진영 간 혐오만 부른다.

고운 시선으로만 볼 수 없는 일부 고발자 대응 문제도 그렇다. 사회 전체가 체통이 없다. 자고로 우리 사회가 경계해 온 행동이 있다. 바로 면종복배(面從腹背). 의롭다고만 할 수 없으면 그건 문제다. 녹음은 어떻게 그리들 잘하시는가. 교육 운운할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커가는 2세들 보기가 민망하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리 비열한 사회로 변해가고 있는 것인지 씁쓸하다. 의(義)와 불의를 흩트리자는 게 아니다. G-7 진입을 기대하는 나라 정도면, 그에 어울리는 국격을 갖추자는 것이다.

여야 정치권이 ‘신사협정’을 맺었다는 뉴스는 간만에 접한 ‘희소식’이었다. 법률로 강제하지 않는 만큼 그 이행은 약속 당사자의 ‘신의성실’(信義誠實)에 기초한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 정치의 자화상이 바뀔 수 있을지, 앞으로 지켜볼 일이다. 오랜만에 접하는 정치권의 이 자구적 노력이 꼭 지켜지길 바란다. 여야가 국민을 위한 법안, 공동체를 위한 법안 마련에 선의의 경쟁을 하고 정치를 복원한다면 국민들의 정치혐오도 사라질 것이다.

‘신사’라는 단어가 의원 각자에게 천금 같은 무게로 다가가길 기대한다. 넥타이 맨 깡패가 아니라, 신사복 입은 망나니가 아니라 다들 진짜 ‘신사’가 되시라. 우리 정치, 우리 국회 이대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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