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9일까지

뮤지컬 ‘시카고’ 스틸컷. 사진=신시컴퍼니 그래픽=김영재
뮤지컬 ‘시카고’ 스틸컷. 사진=신시컴퍼니 그래픽=김영재

《리뷰》

김태훈, 노지현, 오민영 / 미국-레플리카 / 145분 / 디큐브링크아트센터

재즈, 술, 욕망, 폭력, 범죄,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가능했던 1920년대 시카고. 거리에는 유흥과 환락이 넘쳐 나고, 범죄를 저지르고도 거리낌 없는 냉혈한 살인자가 만연하다. 한편 시카고 쿡 카운티 교도소에는 자극적인 범죄와 살인을 저지른 여죄수들이 수감돼 있다. 보드빌 배우였던 벨마 켈리윤공주 분는 그녀의 남편과 여동생을 살인한 교도소 최고의 스타 여죄수다. 그러나 정부情夫를 살해한 죄로 교도소에 들어온 코러스 걸 록시 하트티파니 영 분가 그 벨마 켈리의 악명 높은 인기를 다 빼앗아 간다. 게다가 돈 좋아하고 뛰어난 언변술까지 갖춘 변호사 빌리 플린최재림 분마저 록시 차지가 된 상황. 벨마는 그런 록시를 설득할 방법을 모색하는데⋯.

원제목은 ‘시카고’지만 만약 여기에 부제를 붙인다면 그 이름은 ‘남자를 죽인 여자(들)’일 것이다. “살인은 엔터테인먼트의 일종일 뿐”인 이 도시에서 여자는 남자를 죽이고, 남자는 돈만 밝히거나 혹은 존재감이 없다. 히트 넘버 ‘올 댓 재즈All That Jazz’를 보라. ‘난 누구의 여자도 아니고 내 인생을 사랑해’라는 가사는 작품의 핵심이고, 여기 나오는 여성들의 주제가와도 같다. 

다만 여성이 동등한 기회와 권리를 누리게 하는 여성 자유주의에만 천착하는 작품은 아니다. 근육질 남성과 마르고 맵시 좋은 여성들. 이들 모두는 대개 헐벗고, 또 몸도 아주 탄탄하다. 이에 더해 외설스러운 ‘척’하는 안무까지. 마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와 프락시텔레스의 아프로디테가 현신한 듯한 몸, 그리고 그 몸에서 쏟아지는 리드미컬한 음악을 듣는 재미가 있다. 당시 시카고가 부패와 야욕, 난행에 찌들어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일을 오락으로 여겼다면, 2024년 대한민국은 그 대신 두 여자의 ‘합법적’ 교도소 탈옥기를 보며 그들에 박수를 보낸다.

그중 2021년에 이어 다시 록시 하트 역을 맡은 배우 티파니 영의 연기는 할 말이 많다. 록시의 의상은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진실의 은유인 시스루 원피스다. 티파니 영은 1막부터 2막까지 내내 트레이드마크인 ‘웃는 상’을 유지하며 그런 록시에 백치미를 덮어씌운다. 다 계산된 행동이겠지만서도 너무 해맑은 나머지 신나서 웃는 것인지, 즐거워서 웃는 것인지, 멋쩍어서 웃는 것인지가 구분이 안 된다. 혹자는 이를 고도화된 연기라고 부르겠고, 반대편에서는 아직 연기가 미완성이라고 혹평하겠다. 티파니 영이 유니콘이라면 윤공주는 경주마처럼 힘차다. 몸에 잔근육도 멋지지만, 극의 핵심을 살리며 객석 긴장을 이완하는 연기 근육 역시 뛰어나다.

이 작품을 소위 ‘막장’ 코드로만 해석하는 것에는 사실 제동이 필요하다. “미국에 대한 신뢰”와 “미국이 의미하는 모든 신뢰”를 잃었지만, 그럼에도 주인공을 보면 미국이 얼마나 훌륭한 나라인지 알게 될 것이라는 대사에서 이미 정답이 있다. 이 뮤지컬은 공정한 듯하나 실은 공정하지 않은 기울어진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작품이다. 더불어 벨마와 록시는 사람을 죽이고도 단지 스타가 되면 그만인 안하무인들이다. 특히 ‘위 보스 리치드 포 더 건We Both Reached For the Gun’은 숏폼 콘텐트에 최적화된 넘버일 뿐, 이것을 두고 ‘복화술은 OOO이 최고다’를 따지는 작금의 유행은 이 넘버의 배경을 깡그리 무시하는 견지망월에 다름없어 안타까움을 부른다.

같은 인간인 이상 우리에게도 벨마, 록시, 또는 빌리가 있을지 모르는 일. 환락, 퇴폐, 쾌락. 이렇게 사람들은 ‘시카고’를 보고 욕망의 대리 만족을 느낀다. 복화술보다는, 그게 이 뮤지컬이 현재 매진 행렬을 이어 가는 더 합당한 이유이지 싶다. 9월 29일까지. 5만 6000원~16만원.

파이낸셜투데이 김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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