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궁 전 CJB청주방송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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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막힌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다. “앞으로 더 낮은 자세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총선이 끝나고 승리한 쪽이나 패배한 측 모두 이런 플래카드를 길거리에 내건 걸 볼 수 있다. 대통령도 국무회의에서 선거 패배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면서 ‘더 낮은 자세’로 국정을 살피겠다고 얘기했다.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 것인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동안 다들 ‘높은 자세’로 임해 왔다는 말인가? 건방지고 무례한 언사다. 누가 누구한테 하는 말인가.

선거를 통했건 다른 임용 절차를 거쳤건 국가의 녹을 받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공복(公僕)’(civil servant)이다. 종은 주인을 섬기는 게 의무다. 높은 자리에 있는 건 주인이지 종이 아니다. ‘더 낮은 자세라니’, 착각 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라는 말이 들어갈 여지 없이 애초부터 그렇게 하셨어야 되는 것 아닌가.

‘더 낮은 자세’ 얘기. 윤석열 대통령은 16일 여당이 참패한 4-10총선 결과와 관련, “총선 민심을 우리 모두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며 “더 낮은 자세와 유연한 태도로 보다 많이 소통하고 민심을 경청하겠다”고 밝혔다. 용산 대통령실에서 주재한 13분가량의 국무회의 모두 발언이었다. “아무리 국정 방향이 옳고 좋은 정책을 수없이 추진한다 해도 국민들께서 실제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정부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는 말도 했다.

반성인 듯 다짐인 듯 다소 애매한 가운데 야당과의 협치나 여야 영수회담 등에 대한 구상은 포함되지 않아 여권 내에서도 “국민 눈높이에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참패 6일 만에 비쳐진 대통령의 자세가 여전히 ‘더 내려갈 곳이 있는’ 높은 자세라는 것이다.

윤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 4시간여 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비공개 마무리 발언에서 “대통령인 저부터 잘못했다. 국민의 뜻을 잘 살피고 받들지 못해 죄송하다”고 사과했다며 대통령은 “국민을 위한 정치를 얼마나, 어떻게 잘할지, 국민으로부터 회초리를 맞으며 우리가 생각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고 전했다.

민주당 한민수 대변인은 “대통령이 지금까지처럼 ‘용산 주도의 불통식 정치’로 일관하겠다는 독선적 선언을 한 것”이라며 “불통의 국정 운영에 대한 반성 대신 방향은 옳았는데 실적이 좋지 않았다는 변명만 늘어놓았다”고 비판했다. “국회와 긴밀히 협력하겠다고 하면서 야당을 국정 운영 파트너로 인정하라는 총선 민의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었다”고 꼬집기도 했다.

그러던 대통령이 달라졌다. 굳이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만난다니 잘한 일이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 했던가. 대통령이 이제야 ‘낮은 자세’의 의미를 알아차린 것 같다. 어렵게 이뤄지는 만남이니만큼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물론 당장 뭘 내놓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 ‘첫술에 배부르랴’라는 속담을 새기길 바란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 주요 거리에는 대통령실 홍보수석으로 일하다 이번 총선에 출격해 승리한 김모 당선인의 당선사례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더 낮은 자세’로 임하겠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공직자 재산 신고 액수가 많아서 그런가? 아니면 대궐에서 수석 비서관 벼슬을 한 이력 때문인가? 그동안 매사 높은 자세로 임해 오셨다는 뜻인가? 갑자기 ‘헤드’가 복잡해진다.

그가 돋보였던 것이 있다. 대(對)국민 메시지를 전할 때 대통령에 대해 ‘님’자를 붙이지 않은 것이다. 대통령실 참모들이나 여권 관계자들이 대통령 얘기를 할 때 ‘과공’(過恭)의 예를 갖추는 걸 흔히 보아 온 입장에서는 눈에 띄는 어법이었다. “대통령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대통령님께 보고드렸습니다” 마치 왕을 모시는 듯한 태도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대통령이 어찌했다.” 식의 표현을 썼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국민이야말로 섬겨야 할 상전임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 낮은 자세로 임하겠다”는 인사말은 여러 공직자들이 흔히 쓰는 말이다. 생각 없이 쉽게 쓰는데 곱씹어 볼 바가 많은 말이다. ‘낮은’ 위치의 사람이 ‘높은’ 자리의 사람에게 할 말이 아니다. 헌법에서도​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여 국가권력의 근원과 주체가 국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주종관계가 명확히 설명된다.

불통, 불통하는 윤 대통령이 가장 잘못한 게 있다. 바로 야권과의 불통이었다. 왜 그동안 야당 대표를 만나지 않은 것인가. 확증편향 아니면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확증편향이라면 그건 ‘낮은’ 자세가 아니라 ‘뒤틀린’ 검사의 자세다. 대통령은 국정을 지휘하는 ‘지도자’다. 어느 진영이나 집단, 계층을 대표하는 자리가 아니다. 교도소에 가서 수감자들과도 대화해야 하는 직이다. 전쟁 중에는 적과도 만나야 한다. 소통은 일반적으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 영향권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고 품을 때 이뤄진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으나 그건 극히 예외적이다.

이재명이 누구인가. 대한민국 양대 정당 중의 하나이자 의회정치의 한 축인 야당의 지도자다. 피의자, 피고로 검찰청과 법원을 오가지만 그는 분명 아직 무죄인 정치인이다. 그를 피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가 유죄 판결을 받는 일이 생긴다면 그 건 그때 가서 대응할 문제다.

대한민국은 지금 나라가 두 쪽으로 갈리어 두 열차가 서로 마주 보며 달리는 형국이라고 한다. 명약관화(明若觀火), 불을 보듯 뻔하다는 얘기가 있다. 여야 정치권이 다시 끝없는 정쟁으로 날 가는 줄 모르는 퇴행을 거듭할 것이다.

민주당은 다음 달 2일 국회 본회의를 열고 ‘채 상병 특검법’을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재차 밝혔다. 조국혁신당 등 야권과 함께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에 대한 종합 특검법도 처리하겠다는 방침이어서 여의도 정치판에 뜨거운 특검 정국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서울중앙지검장 출신으로 22대 국회에 입성하는 민주당 이성윤 당선인은 “이번 국회 의정활동으로 김 여사 관련 국민적 의혹을 묶어서 종합특검으로 관철시키겠다”며 “이걸 하지 않고는 국민들의 체증, 화병을 풀 수 없다”고 했다. 이성윤과 윤석열은 사법연수원 동기로 검찰 재직시 앙숙지간이었다.

어쩌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됐는지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니다. 특검이 나쁘다거나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잘잘못이 있으면 백일하에 드러내고 응분의 대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벌어질 여야 진영 간의 ‘이전투구’가 문제라는 것이다. 나라가 결딴나는 퇴행과 만행이 넘쳐날 것이다.

국가 운명을 쥔 대통령이 할 일이 무엇인가. 말로만 낮은 자세가 아니라 성심 어린 진심으로 구국의 방책을 모색해 봐야 되지 않겠는가.

끼리끼리만 만나면 수(手)가 나오지 않는다. 허구한 날 그 소리가 그 소리, ‘정치의 근친교배’로는 타개책을 마련할 수 없다. 평소 반대편을 만나고 이재명도 자주 만나라. 머리가 터지도록 술이라도 마시면서 나라 살릴 방책들을 마련하라. 제발 나라와 민족, 공동체에 죄짓지 말라. 정치가 선진 한국의 발목을 잡아서야 되겠는가 국민들이 “이대로는 더 이상 못 살겠다”고 외치고 있다.

얼마 전 작고한 홍세화는 케이티엑스(KTX)를 타면 일부러 역방향 좌석을 택한다고 했다. “(역방향으로 앉아 있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뒤로 물러난다”는 것. “빠른 속도로 물러나고 또 물러나 마침내 소멸되는 그런 상을 머릿속에 그렸다”고 한다. 한겨레가 죽음을 앞뒀던 ‘빠리의 택시 운전사’를 인터뷰했다. 또렷한 역사관으로 평생 고단한 삶을 살았던 한 지성(知性)의 겸허(謙虛)가 읽힌다.

‘낮은 자세’를 갖는다는 건 자신을 죽이는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대를 지배하고 누르고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존중하고 배려하고 섬기는 것이다. 한국 정치는 변곡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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